후회 없이 살고 싶다.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살면서 깨닫는다. 후회 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는 후회를 예감하며 한 발을 내딛고 자신이 감당할 만한 후회를 삼키며 살아간다. 어떤 일을 겪어낸 이들에게서 내가 본 의지와 끈기 같은 것, 그러니까 저력이라 불렀던 것은 숱한 후회를 감수하면서도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마음이자, 후회를 뒤로 감춘 채 내주는 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뒷자리에서도 여전하다. 어떤 흔적을 뒤적여도, 아무리 오래된 사건과 만나도, 여전히 움직이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움직였기에 나 또한 아주 천천히 몸을 틀 수 있었다.
공단 담벼락 안에 가두어도 “우리에게 봄이 올까요?” 묻는 이들이 있다. 머나먼 여정 끝에 낯선 땅에 와서도 지치지 않고 도시로 가고 싶다는 이가 있다. 건전지처럼 갈아 끼워지면서도 자신들의 일이 귀하게 대우받는 날이 올 때 그 자리에 있고 싶다고 하는 이가 있다. 사람들이 모르는 싸움을 했지만 “우리 그때 정말 잘 싸웠지?”라고 신명나게 말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저 지나간 일의 흔적을 좇으려 했을 뿐인데, 이들은 그곳에서도 크고 작은 것을 감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책에 담았다. 이것은 사건이 지나간 후, 그 뒷자리에서 내가 하는 일이다.
--- p.9~10
나는 누군가 악을 쓰며 싸우는 소리를 느지막이 듣는 사람이다. 귀 밝은 이들이 앞서 달려간 곳을 더디게 따라가면, 그곳에는 무언가를 막아내기 위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제야 나도 자리를 잡고 기록을 한다. 그러는 사이 싸움이 끝나, 이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들은 ‘이겨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돌아가는 길목에 늘 승리가 있는 건 아니다.
이긴다… 그것이 과연 이뤄질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고 나면 ‘이긴다’는 행위는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진다. 온전히 외쳐지는 요구도 없거니와 온갖 상흔과 감정이 쌓이는 까닭에 승리의 의미는 굴곡지거나 그 속을 채우는 내용이 달라진다. 누구든 싸움판으로 첫발을 디딜 때는 많은 다짐과 결심, (희망과 단념을 동시에 품는) 계산과 예측을 하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예상한 것이 무엇이든 그 마음만으로는 버틸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있다. 나는 그 무언가를 좇는 사람이지만, 때로 싸움이 지나고 난 자리를 생각한다. 싸움이 끝났다고 말하는 자리에 여전히 남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 p.15~16
송전탑이 완공된 지 3년이 지나 기사 하나를 보았다. 3년이면 기억이 잊힐 만한 시간이다. 사건이 잠잠해질 시간이다. 그런데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지금이 제일 힘들다〉
--- p.19
국가는 소박한 삶들로부터 승리했다. 밀양은 국책사업 의지를 천명하는 장이 됐다. 산업의 기반인 전기가 전 국토에 깔려야 한다고 했다. 산업발전 앞에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불가피한’ 희생에서 비롯하는 저항은 돈으로 메웠다. 비용은 적을수록 좋았다. 정당한 보상과 민주적 합의에는 큰 비용이 든다. 선로를 변경하는 일에도, 다른 대안을 찾는 일에도 돈이 든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지역민들이 입은 정신적·신체적 피해는 조사되지 않았다. 피해는 몇 푼의 보상금으로 영구 은폐됐다. 덕분에 우리의 전기는 밝고 저렴했다.
--- p.28
“포탄이 하루 몇 개 떨어지는지 아세요? 적게는 400개 많게는 700개. 진짜 실탄이 떨어졌으면 몇 번 만에 섬이 다 폭발했을 텐데. 훈련용이라 그나마 남아 있는 거예요. 옆에 섬 하나를 완전히 없애고, 2000년에 폭격이 멈춰 농섬은 살아남은 거예요.”
마을 주민이 들려준 이야기. 전투기와 공격용 헬기가 매향리 인근을 저공 비행하다 인근 섬들(농섬, 웃섬, 구비섬 등)을 목표물로 삼아 폭격을 가한다. 폭격장의 면적은 700만 평. 평일이면 아침부터 밤늦도록 총성과 포탄 떨어지는 굉음이 이어졌다.
--- p.49
나아리 주민 황분희 씨는 “여긴 모든 게 오염된 거라. 사람마저도.” 하며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하지만 한수원의 말은 다르다.
“우리 손녀가 학교 갔다 와서 그러는 거라. ‘반 친구가 그러는데 원자력은 절대 사고 안 난다고 해요’ 내가 ‘그래, 그 친구가 어디 사는 친구냐’ 하고 물으니까. 한수원 사택에 사는 친구라고. 그러면 그럴 수 있다. 다음에 그 친구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후쿠시마는? 일본 사고는 어떻게 일어났냐’ 하고 물어봐라 그랬어요.”
--- p.76
“요즘 산란기야? 왜 이렇게들 임신을 해.”?
모 임원이 임신한 여성 직원들을 가리켜 한 말이라고 했다. 가해자의 인성뿐 아니라 일터가 임신부 노동자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농담’이라 했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이니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말이 문제로 인식된 것은 한참 뒤였다. 롯데호텔 파업이 없었다면, 평생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 p.108~109
아무리 입을 막아도 말하는 여성들이 있고, 아무리 내보내려 해도 나가지 않는 여성들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당시 어느 직장이건, 임신해도 그만두지 않던 선배를 원망하다가 본인이 임신을 하면 저 선배가 ‘눈칫밥’ 먹으며 버텨준 덕에 자신도 다닐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나둘이 남아 여럿이 되면, 임신부에 관한 매뉴얼이나 사내규칙이 변경됐다.
“그때는 몰랐는데.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한 거였어요. 임신하고도 회사를 계속 다니고 그런 것이, 나중에 보니.”
--- p.118
교육부의 변명이겠지만, 학교장들이야 당연하고 교직원들도 전수조사를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사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내가 롯데호텔 사건에서 용화여고 미투 사건을 떠올린 것은, 단지 무언가를 써서 붙인다는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롯데호텔에서 ‘재계약은 없다’며 엄포를 놓던 관리자와 “생활기록부를 쥔 채로 미래를 망쳐주겠다고 엄포를 놓던” 교사의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다. 모든 교사가 가해자라는 말이 아니라, 교사가 지닌 위력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 p.136
성폭력 사건에는 가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만 있지 않다. ‘모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20년 전으로 돌아가면, 롯데호텔에도 가해자 그룹이 섬처럼 따로 있던 것이 아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일상적으로 이뤄졌고, 그 일상을 모른 척하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정말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눈을 돌리지 않으면 모르고 사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기수가 탄 말처럼 앞만 바라보고 가는 생활이 이어진다.
--- p.137
늦가을이 되어서야 조계사 농성은 마무리 되고, 114 노동자들은 일터로 복귀했다. 산재 대상자들을 향한 퇴사 종용을 멈추고, 개인이 원할 시 타부서로 재배치한다는 약속을 회사로부터 받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골병이었으나, 이들은 싸움 끝에 성과를 만들어냈다. 자신들의 싸움을 누가 알려나 하지만, 그 투쟁을 뚜렷이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그녀들 자신이다. “우리 정말 잘 싸웠다”라는 말이, 그 시절을 증명했다.
하지만 농성을 마무리하고 일터로 돌아갔을 때, 이들을 기다린 것은 익숙하고도 새로운 위기였다. 그들의 노동을 ‘잉여’ 취급하는 일터는 바뀌지 않았다.
--- p.156
기록을 보니, 관리자가 야간 근무 조회 시간에 여성 직원들에게 “참아보자! 참아보자!”라는 구호를 외치게도 했다. 그때는 드러내면 안 되고, 참아 넘겨야 하는 일로 여겨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 그가 일했던 일터인 KT 114는 첫 멘트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말하게 했다. 그게 진상과 성희롱 고객이 흘러들어오는 입구가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콜센터로 전화를 하면 수화기 너머에서 이런 멘트가 흘러나왔다.
“산업안전보건법에 고객응대 근로자 보호조치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폭언, 성희롱 시 관련 법령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 p.177
“내가 없으면 회사가 일을 못 합니다. 작년에 고무호스를 끼우다가 산재가 났는데. 한 달 회사를 못 갔어요. 내 없을 때 회사에서는 이 사람도 넣어보고 저 사람도 넣어보고. 못해요. 고무 모형이 10개 20개가 아니고, 1,000개가 넘어요. 그만큼 다양하게 있다는 겁니다. 저도 다 몰라도 800개 정도는 아는데. 며칠 와서 일하는 사람이 그걸 다 기억할 수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회사도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회사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지 않는다. 저렴하기에 사용하는 노동력이다. 그 노동을 인정하는 순간 저렴하게 사용할 수 없어진다.
--- p.192~193
남편을 따라 광주 고려인 마을에 온 이는 안산으로 가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여기를 떠나고 싶어요?”라고 묻자 일자리 이야기를 한다. “여기는 일이 없어요.” 생산직 일자리만 만연한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댁 이야기도 슬쩍 한다. 가족이 많은 것이 갑갑하다고 했다. 한국인들로부터 고려인은 가족이 소중하다는 이야기만 들어온 터라, 그렇게 감정을 털어놓는 이가 반가우면서도 반가운 기색이 드러날까 봐 조심스러웠다. 한국에 처음 와선 안산 고려인 식당에서 홀서빙을 보았다고 했다. 그때를 그리워한다. 지역을 떠나고 도시로 가고 싶은 욕망이 한국 지역사회 여성들의 서울 이주 욕망과 겹쳐 보여, 나는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듣는다. 이주라는 조건 속에서도 저마다의 결대로 뿌리를 내린다. 이들이 한민족이라 이 땅에 뿌리는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어디서 누구로 단 한 순간을 살아도 뿌리를 땅에 박아야 하는 것이 삶일 뿐이다.
--- p.217~218
‘여직원’ ‘아줌마’ 이들은 인터뷰 내내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가씨 자리’. 아가씨 자리에서 일하는 아줌마라. 다른 명칭도 나왔다.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우리는 잡부였어요. 오만 잡일 다 하는.”
이들의 직업은, 경리다. 명함 한 장이 없다. 명함이 있다 해도 새길 직책이 없다. 사람들은 사무실로 전화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가씨, 남자 바꿔.”
--- p.219
신자유주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잔혹도 하다. 수레바퀴의 가속을 저지하는 방법을 애써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너랑 나랑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늙은 노동자의 말일 수도 있겠다. “빗길에 미끄러지며 일하는 주차관리 요원”을 돌아보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차이를 두어 일하는 사람을 쪼개고 나누려는, 결국은 버려지는 속도만 다른 소모품으로 만들려는 기업에 대응하는 길에 무엇이 따로 있을까. 나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 소모품이 아니라 우리로 살려고 애쓰는 일.
법의 편리와 기업의 필요에 의해 나뉘고 쪼개진 자신들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그녀’들의 싸움을 응원했다. 아니 응원한다.
“설사 승리 못 하더라도, 아무것도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뭐든 다 해봤어요. 저는 제가 기특해요. 잘했어. 기특해. 난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 (강미희)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