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나르시시즘,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끝내 자기 자신을 파괴할 부정적 나르시시즘의 말 없는 자매들인 우울, 수치, 불안과 같은 감정들은 애당초 슬픈 소녀들의 몫으로 지상에 남겨진 것이라고. 그러므로 월런은 슬픈 소녀 이론을 통해, 소녀들의 슬픔의 역사를 (성차별적인 세상에 대항해) 소녀들이 반응하고 저항해 온 역사로 재탄생시키자고 제안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의 편에 서기를, 그와 함께 (그 끝이 공허일지라도?) 가속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소녀들의 슬픔은 조용하거나, 약하거나, 부끄럽거나, 멍청하지 않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자율적이며, 명료하다. 그것은 반격의 한 방법이다.””
--- p.26, 「1장 슬픈 퀴어 초상」중에서
“이곳처럼, 어떤 공간은 분명 과잉 성애화된다. 당신이 원래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성별이나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든 간에, 당신의 모든 몸짓과 말과 눈길은 고스란히 이곳이라는 예외적 공간에서만 허락되는 비밀스러운 암호로 재배열된다. 이곳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전부인 스타일의 분류학은 이곳을 지배하는 암묵적인 규칙이다. 여기서 고리타분한 이분법이 유용해진다. 당신은 머리가 길고 화장을 했기에 부치를 찾는 팸이다. 당신은 머리가 짧고 가죽 부츠를 신었기에 팸을 찾는 부치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냥 복장도착자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종의 롤플레잉이지만, 그렇다고 진짜가 아닌 건 아니다. 부치들 팸이든 복장도착자든 이곳에 모인 몸들은 각자의 질량에 대응해 서로에게 감응하고 충돌한다. 잠재적으로 당신을 원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그러므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에로틱한 다른 몸들 사이에 놓인 당신은 자신의 몸을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감각한다.”
--- p.50, 「3장 뉴플 스케치」중에서
“이제 우리는 〈엣지러너〉가 제공하는 사이버펑크적인 스타일의 외피에서 살짝 비켜서서 이 작품을 도시 빈민 소년에 대한 우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는 살기 위해 사이버웨어를 장착하고, 사랑에 빠지고, 위험한 일을 시작하고,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 일종의 정서적 무감각 상태에서 높이 날아오르다가 결국 가파르게 추락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끝장을 내기 위해 최악의 적에게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 살기 위한 선택이 곧 삶 자체를 축소하고 소진시키는 선택이기도 할 때 이러한 선택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살에 가까운 죽음뿐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선택지 속에서 아등바등대며 분투해봤자 결국 거대 기업에 의해 간접적으로 살해당할 뿐인 하위 주체들의 삶을 묘사한 우화가 속할 장르는 과연 비극적인 드라마인가, 아니면 슬랩스틱 코미디인가? 로렌 벌랜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시트콤과 비극을 결합한 조어인 “상황적 비극”으로 부를 만한 〈엣지러너〉는 데이비드라는 도시 빈민 소년을 주인공 삼아 삶의 유일한 목표가 생존이 될 때 주체가 어떻게 닳고 찌그러지는지를 총 10화에 걸쳐 느릿하게 보여준다.”
--- p.64, 「4장 문제는 디자인이다」중에서
“왜 트위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상적인’ 그리고 ‘쓸모 있는’ 인간성을 회복할 만한 시간과 여유가 있는 소수의 특권적인 사람들의 훈계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세상은 이미 쓸모 있는 것들, 그럼으로써 시장에서 교환될 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들로 넘쳐난다. 그런 신물 나는 경제 논리에 포획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몇 달간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심하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로부터 일말의 유용성을 긁어모으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트위터를 계속한다면 뇌가 망가지고 그것이 주는 쾌락에 구속되어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밤낮으로 해대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전략은 오직 지금보다 더 한심하고 쓸모없게 구는 것이다.”
--- p.81, 「5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트위터 중독자들」중에서
“나는 이러한 이론적 참조점을 배경에 두고 ‘저급 이론들의 연합’을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진 세 번의 라운드테이블로 구성했다. 야광 콜렉티브(김태리, 전인)와 홍지영과 함께 한 첫 번째 라운드테이블은 “여성, 퀴어, 콜렉티브”라는 제목으로 ‘콜렉티브’라는 협업 또는 친밀성의 형식, 레즈비언 ‘미학’의 특수성에 관한 질문들을 나눈 자리였다. 우리는 레즈비언의 최소 정의를 비워둔 채 무책임한 ‘인상 비평’을 던지며 과연 ‘레즈비언적인 것’이란 무엇인지 탐문했다. 강덕구, 이여로와 함께한 두 번째 라운드테이블, “아마추어리즘과 비평”에서는 아마추어리즘, 블로그 네트워크, (청년 세대에게는 더더욱 구축하기 힘겨워진) 독립적인 보상 피드백과 우정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나는 이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퀴어(한) 스타일과 태도로서의 실패를 각기 다른 학제적/공동체적 맥락 내에 존재하는 아마추어적인 것, 소수자적인 것들과 간접적으로 연결해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문상훈, 양승욱, 이반지하와 함께 한 세 번째 라운드테이블은 “실패의 퀴어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예술 기금으로 표상되는 공적 기관/제도/체계로부터 인정, 퀴어 예술(계) 내부의 차이, 축적되는 실패의 감각에 대한 우울하고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 p.98~99, 「7장 라운드테이블 “레즈비언 미술은 왜 구린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