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니고데모였다. 야심한 밤에 남몰래 예수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던 사내 말이다. 나도 그처럼 성경을 묵상했 고, 신학에 빠져들었다. 우주와 삶, 신과 존재, 역사와 현 실에 대한 질문을 안고 탐독하며 배워 나갔다. 니고데모 가 내면의 답답함과 의문을 품고 예수를 찾아가 만났듯이 나도 예수를 만났다. (중략)
니고데모는 예수와 대화한 후, 무미건조한 신을 떠나보내고 신선한 리듬과 생동감으로 가득 찬 하나님을 느꼈다. 나도 판단하고, 평가하며, 심판하는 하나님을 떠나보냈다. 그 후로 하나님은 바람처럼 다가와 호흡이 되었다. 숨통이 트였다. 내 가슴은 따스해졌고, 친절함이 찾아왔다. 글을 쓰면서 예수 옆에 앉아 그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리듬에 따라 함께 호흡하며, 대화를 나눈 특별한 시간이었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우리에게는 남에게 말 못 할 시간과 장소가 있다. 폭로되면 무너질 것 같은 부끄러운 곳이 있다. 예수는 그곳에서 나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 장소는 내게 그렇듯이 예수에게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일부러 그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길은 심판과 정죄의 눈길이 아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두려움을 읽어내고, 나를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따스한 눈길이다. 예수의 눈길은 통찰력으로 번득인다. 나다나엘에게서 진실과 정직이라는 자질을 읽어냈듯이.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 랍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엄격하고, 전통적인 유 대교는 그의 삶이었고, 문화였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처럼 엄격하고 권위적인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무한한 힘을 가졌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를 판단하고 심판했다. 하지만 초월적이고, 가부장적인 하나님에게서 니고데모의 마음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중략)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은 너무도 신선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게는 리듬과 생동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익숙했던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하나님과 달랐다. 이 하나님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숨 쉴 공간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예수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의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은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숙한 곳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의 마음에 새로운 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부 시작에서 오다」중에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세요.” 예수가 말했다.
씻으라는 말은 그의 삶에 결핍된 단어였다. 이 말이 오늘처럼 청량한 음악처럼 들린 일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씻어본 기억이 없다. 늘 지저분한 얼굴, 초라한 행색만큼이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억눌려있었다. 그의 인생은 저주, 책임, 죄, 수치심이라는 단어와 늘 엉켜 있었다. 신학자들은 그를 가운데 앉혀 놓고 시각장애와 저주의 관계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 강연했다. 아이들은 그 사내를 저주하는 욕을 내뱉었고,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돌이 날아왔다. 그는 이 지역에서 저주의 아이콘이자, 놀림거리였다. 어느덧 자신도 그런 취급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자책했다. 저주받은 존재임을 자인했다.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은 그의 편에서 말했다. 그의 인생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누구의 죄 때문에 장애를 얻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언어는 너무도 낯설었다. 누군가가 그의 편에 서서 이야기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완벽하고, 편안하며, 건강한 상태가 영속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처럼 삶은 죽음을 벗 삼을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신을 욕한다. 인류에게 왜 고통이 따라다니는지 묻는다. 우리의 질문에는 끝이 없다. 고통을 피하고 싶고, 고통을 받아들이기 싫고, 고통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으로 고통을 부정한다. 하지만 고통을 이기는 길, 고통을 치유하는 길은 예수처럼 모두가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다. 서로 가슴 아파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2부 사람으로 살다」중에서
인간관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비즈니스에서 불공평한 결과를 수용해야 하거나, 법정에서 부당한 판결을 받으면 울화가 치민다. 이렇게 크고 작은 고통이 모여서 우리의 심장을 조여오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침묵을 강요당하면서 타인의 힘과 권력 앞에서 무력하게 끌려다녀야 하는 가슴 아픈 경험들이 쌓이면 모멸감과 무력감에 허우적대게 된다. 우리도 크고 작게나마 예수처럼 빌라도의 법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비극적인 트라우마가 십자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이런 경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면, 우리는 스스로를 경멸하게 된다. 감정은 무뎌지고, 기계처럼 자동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
---「3부 부활을 향하다」중에서
전통적인 주석서나 강해서의 형식을 따르지 않지만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제대로 포착하고 부각하고 있다. 독특한 설화체 요한복음 독후감에서 전통적인 장별, 단락별 해석을 취하는 대신에 요한복음의 서사적 줄거리를 따라가며 요한복음 저자와 생동감 넘치는 대화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엄밀한 학문적 차원에서 요한복음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거니와 요한복음의 해석사에 등장한 선행연구들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오로지 순전히 자신의 실존적 지평에서 깊이 묵상해 체득한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를 생생하게 복원하려고 한다.
---「김회권(숭실대학교 교수, 기독교학과), 추천하는 말」중에서
박현욱은 법에 기대 살고 있는, 잘나가는 변호사다. 법의 세계는 심판의 세계다. 옳음과 그름, 성공과 실패, 심판과 정죄는 그의 일상이었다. 그 세계는 우리를 어쩔 수 없이 각박하게, 경직되게, 차갑게 만든다. 잘나갈수록 영혼의 감옥이다. 어느 날 그는 예수에 매료된다. 자유로운 예수, 자연스러운 예수, 함께 하는 이를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하는 예 수! 그는 예수에 귀를 기울인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씀 앞에 서면 정직해진다. 무지가 부끄럽지 않았고, 아는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니고데모처럼.
---「이주향(수원대학교 교수, 철학), 추천하는 말」중에서
저자는 요한복음서를 “한 인간이 자신을 찾고, 자신을 버린 뒤에 거대한 우주적 소명을 성취하는 대서사시”로 읽는다. 그리고 그 대서사시는 예수에게서, 요한에게서 끝나지 않고, 오늘의 그에게, 우리에게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예수의] 삶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반복된다.” 이 책은 1세기의 예수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삶에서 재현하고 싶어하는, 21세기 한 그리스 도인의 뜨거운 예수 사랑 이야기다.
---「정경일(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추천하는 말」중에서
그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스무 개가 넘는 에피소드로 담담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예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간략하게 스케치한다. 저자는 예수 부활을 “생명으로 가득찬 신비한 사건”으로 해석하지만 부활의 전모는 이 해석을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는 부활을 말로만 강조하고 실제 삶에서 부활의 동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제도 기독교의 현실을 극복하는 신앙적 인식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완상(前 부총리, 통일원장관), 추천하는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