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중에서
누구든지 신뢰할 만한 설교자는 그의 삶이 기독교의 본질이기에 매 순간 즉시 활용 가능한 현존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설득력이다.--- p.프롤로그 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스스로 판단하라』는 1851년에 원고가 완성되었으나, 『스스로 판단하라』는 출판을 미루다가 1876년에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두 저서의 공통점은 당시 “세속화된 루터교”를 비판하고 “진정한 기독교”를 변호했다는 점이다. 두 저서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자도 혹은 본받음이다.--- p. 옮긴이의 말 중에서
모든 것은 선한 행위가 되어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나무의 성장처럼 이러한 행위 역시 건강하지 못한 성장 탓에 무너져 내렸다. 이리하여 행위는 위선이었고, 공로의 교만, 무익이 되어 있었다. 오류는 거기에 있었고 행위는 많지 않았다. --- p.26
기독교는 어떠한가. 삶은 가능한 한 맹렬하게 행위를 표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구한다. 구원받은 것은 은혜라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한다. --- p.30
부르심을 받은 자들 중에 시험이 면제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이가 애원하고 탄원하는 것처럼 시험이 면제되기를 애원하고 탄원한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계속 가야 한다. --- p.36
첫 번째 요구조건은 당신이 거울을 보지 말아야 하며, 거울을 관찰하지 말아야 하며 거울 속에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p.47
둘째 요구조건이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실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기를) 거울 속의 자신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새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이 나에게 말하고 있다. 말씀은 나에 대해 말한다.” --- p.64
기독교 관점에서 삶과 설교는 같다. 같은 가르침을 표현해야 한다. “그 길”은 좁은 길이다. 이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고 좁은 길이다. 이 길은 처음부터 좁았다. --- p.101
사람들은 처음부터 왕과 통치자가 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은 처음부터 왕과 통치자가 되지 않으려고 그를 막기 위해 무한히 엄청나게 노력했다. --- p.103
처음부터 안다는 것은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그분 생애 초기부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했을 때 그분은 그 순간에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막 15:13-14)라고 외칠 사람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 --- p. 105
그 길은 인간의 지혜와 상식으로서 걷는 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지혜와 상식을 가질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모험할 수 있고 더 많이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상식이 의지하는 한 가지가 있다. 오랜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고난을 참고 고군분투했을 때 그 길은 점점 더 넓어지고 쉬워져서 마침내 살아 생전에 승리한다는 확신이다. --- p.108
누구도 이 같은 방식으로 승리한 적은 없다. 그분은 천사의 무리와 함께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의 승리는 전능자의 우편에 앉는 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시작의 끝에 불과하다. 오, 영원한 승리자여. --- p. 117
무엇보다 그들은 어떤 근거로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려고 애썼다. 혹은 기독교를 지지하기 위해 근거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이런 근거는 의심을 더 키웠고 의심은 더 강해졌다. 기독교의 입증은 “본받음(제자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간과해버렸다. --- p.121
삶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때 어떻게 당신은 의심하겠는가? “먼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만이 이 주제에 대하여 말할 권리를 갖는다. 그들 중에는 어떤 사람도 의심하지 않았다.” --- p.126
사람들은 기독교는 부드러운 위로, 위로에 바탕을 둔 부드러운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래,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이 먼저 죽는다면, 죽어간다면 그러나 그렇게 부드럽지 않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분이 왜 사람들을 초대하는지를, 고통당하는 자를 얼마나 애타게 찾는지를. 그들의 영혼을 위해 쉬게 하겠다고 약속하는지를 들어보십시오.” --- p.136
새로운 생명, 문자 그대로 새 생명이다. 잘 관찰하라! 이 죽는 것과 죽음 이면의 생명 사이에 죽음이 온다. 맞다, 이것은 새 생명이다. --- p. 136
사람은 모든 존재가 이기심만큼 확고하게 의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이 분리되는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사람은 자신의 이기심에 의존하는 것만큼 확고하게 육체를 의존하지 않는다. --- p.139
기독교는 인간이, 너와 내가 그토록 열망하여 버텨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다. 돌팔이 의사는 즉시 당신에게 봉사하며, 즉시 치료법을 적용하고 모든 것을 망친다. 하지만 기독교는 치료법을 적용하기 전에 기다린다.--- p.143
성령은 믿음, 믿음을 가져오신다.(고전 12:9)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죽음 후 그 사이에 나타나는 성령의 선물이다. 인간들의 말은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볼 때 종종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 p.146
사도들은 지속적으로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한다.1 말하자면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계속 사랑하려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영은 사도들에게 사랑을 가져온다. -152
해제 중에서
『자기 시험을 위하여』의 1부는 야고보서에 대한 변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도로 이 작품에서는 행위와 공로를 다룬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 말씀을 다루면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거울 앞에서 자기자신을 보는 행위”라고 역설한다. -162
언제나 같은 관점에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철학의 부스러기』와 『불안의 개념』에서 “순간”의 의미를 다루었다. 키에르케고어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인 실족과 순간과의 관계를 살피고, 『자기 시험을 위하여』와 『스스로 판단하라』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본받음”은 결국 순간의 운동임을 밝힌다. --- p.165
기독교 세계에서 십자가의 실족을 제거하는 것이 기독교를 얼마나 타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는지 이렇게 고민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생각한 순간은 명확히 진리의 성육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 p.171
? 달라스 윌라드가 『잊혀진 제자도』에서 제자도가 생략된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하지만 제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부류들을 “흡혈귀 그리스도인”이라고 비판했다면, 키에르케고어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본받음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 그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적다. --- p.186
옛 사람의 죽음을 요구하는 성령, 그에 따른 회개와 후회의 운동이란 자기해석학의 운동인 셈이다. 이것은 마치 해석의 순환과도 같다. 끊임없는 자기의 재발견이다. --- p.196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같고, 이로 인해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다. 죄 있는 인간이 죄 없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모세가 경험한 것처럼 “죽음의 경험”이다.
---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