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느림 La lenteur 』에서 밀란 쿤데라는 속도라는 악마는 망각과 회피를 동반하고, 느림은 기억과 대면을 동반한다고 썼다.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싶을 때, 다른 사람과 세상에 귀 기울이고 싶을 때 우리는 속도를 늦춘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싶을 때도 느리게 행동한다. 속도를 늦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대의 바쁜 생활 속에서 우리는 관찰하고 듣고 한발 뒤로 물러서서 생각하고 명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쿤데라는 우리 사회가 떨리는 기억의 작은 불꽃을 훅 불어서 꺼버리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새들은 여전히 지저귀고 있고 태양은 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멀리 건초더미가 쌓여 있는 들판에 트랙터 한 대가 지나간다. 현대인의 바쁜 생활도 요즘의 내게는 먼 나라 일이다. ―본문 15~16쪽
나는 이제 더 이상 뉴욕의 보도에서 앞사람을 밀면서 걷고 있지 않으며 차에 앉아 스트레스에 가득 차 있지도 않고 꽉 막힌 고속도로 한가운데 있지도 않다. 흙으로 뒤덮인 길을 당나귀와 걸어가는 일은 도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내심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 떠 있는 요트나 아기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백일몽이 된다. 그것은 정확한 발걸음의 리듬을 즐기는 데서 나오는 선물이다. 느릿느릿 더 멀리 걸어가면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속되게 하는, 그래서 모든 빛나는 충만함으로 연결되게 하는 데서 나오는 선물. --- pp.51~52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들이 그날 밤 저녁을 먹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내가 앙드레와 식사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교수였는데 더 이상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배우고 싶었고, 세상 밖으로 나가서 변화하고 싶었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탐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다. 광기 어린 소음에서 빠져나와 느릿느릿 걸으며 조용함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정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자연과 교류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67
나는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반평생을 보냈다. 오래 전에 나는 성인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지치고 녹초가 되는 삶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만의 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어딘가에 다른 삶이 존재할 거라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흘러 한 차례의 생이 지나간 후, 나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오두막에 은거하게 되었다. 나는 깊은 침묵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나는 대로 몇 줄씩 끼적거리면서 충실하고 조용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내 곁을 지켜주면서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 친구의 조언만은 받아들인다. 당나귀는 이해심 있는 커다란 두 개의 귀를 가지고 있다. --- p.71
숲속에 들어가면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생태계 한복판에 뚫린 거대한 빈 공간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침묵의 소리가 전율과 두려움과 불가해한 고요를 불러온다. 그리부예도 나도 그것을 느낀다. 눈을 부릅뜨고 앞에 놓인 나무들 사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살피면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밑의 대지에서 공허한 울림이 되돌아온다. 우리가 나무를 피하면서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리부예는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다. 굉장히 빠른 걸음이다. 나는 그를 따라잡느라 애를 먹는다. 그는 밖으로, 이 숲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그는 탁 트인 개간지를 향해서, 빛을 향해서, 햇살을 향해서 존재론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던 “먼 거리의 가까움”을 향해서 나아간다. --- p.87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기를 원하다니. 뉴욕이 내 뇌를 조금씩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뉴욕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너무 많은 성공이 눈앞에 떠다닌다. 거부할 수 없는 게임이다. 그리고 당나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센트럴 파크 주위에서 벌레에 시달리고 있는 기진맥진한 말들이 있을 뿐이다.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도 않았는데 그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오고야 말았다. 나는 곧고 빠른 길을 가고자 한, 자만심과 야망과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교만해진 발람이었다. 섬의 영주 자리를 약속받고 기뻐했던 산초였다. 그렇게 어리석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이 평생을 거쳐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진정한 행복의 정의는 아니다. 다소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이 말은 진실이다. 진정한 행복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놀라운 우여곡절 끝에 정직한 통로를 거쳐 찾아온다. 곧고 좁은 길은 대개 거짓된 길, 자신을 속이는 길이다. --- pp.117~118
내 천성이 당나귀의 천성을 닮기 시작하면서 평온한 공백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것,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공허하고 텅 빈 느낌과는 다르다. 나는 그저 그와 함께 하는 일에 집중한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지금 그리고 여기, 절대적인 현재만 있을 뿐이다. 나는 맨몸으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부예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고, 한 푼도 갖고 있지 않고, 먹고 마시고,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나귀처럼.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나다. 단 하나의 자아. 그것뿐이다. 자신을 당나귀의 세계에 들여놓고 천천히 걸으면서 깊게 숨을 들이쉬면 평온함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단순하고 확실해진다. 민들레를 먹는 일처럼 --- p.147
이것은 독일 리트에서 영감을 얻어 시인 하이네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F단조의 낭만적인 독창곡들과 발라드로 이어진다. 당나귀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낭만과 애수다. 브레송은 당나귀의 송가로 기가 막힌 주제곡을 선택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갖는 신비한 힘은 당나귀의 울음소리처럼 대지를 뒤흔들어놓는다. 따듯한 당나귀 털의 부드러움, 순수한 “무심함”의 응시, 산 위의 평원, 양의 목에 매달린 종소리, 당나귀의 죽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평생 동안 고생만 하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텅 빈 들판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다. 그것은 우리들의, 당나귀처럼 살아온 우리들의, 절망에 물든 희망의, 영혼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의,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다. --- p.173
사람들은 대개 가장 빠른 길로 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가장 좋고 바람직한 길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는 길은 길이 막히기 십상이어서 천천히 가게 되고, 그 결과 먼 길로 가는 것보다 더 늦게 가게 된다. 그렇다고 중간에 다시 돌아오거나 다른 길로 우회하기는 어려워서 어느 순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물론 자기주장대로 간 사람이 막다른 길에 이르거나 잘못된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신은 아시리라, 나도 몇 번 그런 적이 있다. 미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은 아마도 잘못된 길이었고, 빨간 신호등에서 좌회전을 한 셈이었을 것이다. 모르겠다. 하지만 가다 보면, 특히 다시 되돌아가야 할 때 뜻밖의 일이 생기기도 한다. 미지의 영역이 어렴풋이 보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 만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일이 잘 풀린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 p.183
나는 온전히 여기에 있고, 여기에 현존하는 나 자신과 대면해야만 한다. 놀랍게도 나는 이것을 깨닫는 데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 나는 공허감을 느꼈다. 일종의 금단증상이었다. 부산스러움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환경을 너무 갑자기 바꾸려고 했던 데서 오는 부작용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주위의 누구와도 면식이 없는, 이상한 말투로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눈에 띄는 이방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점점 자의식이 강해졌다. 강한 자의식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한때 속해 있던 곳에 더 이상 속해 있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무서운 결핍감에 시달렸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 곳에서도 속해 있지 않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조금씩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허감이 차츰 채워지고 겸손한 풍요로움이 어느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맑고 투명한 존재감이었다. --- pp.236~237
산초는 대플을 통해서 카프카가 말한 “산초 판사의 진실”을 보게 된다. 자신에 관한 진실, 즉 자신이 단순한 당나귀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단순하고 솔직하고 평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산초는 본질적으로 야망이 있거나 냉소적이지 못하다. “여러분, 길을 비켜주시오.” 대플과 포옹하고 길을 떠나기 위해서 길마를 정리한 뒤 산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전의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가겠소. 예전의 내 삶을 되찾아 떠날 것이니 죽음과 같은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두시오.” --- pp.315~316
그리부예는 위대하고 놀랍도록 슬픈 눈을 하고 그 자리에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 조금 후 우리 셋은 서로 부둥켜안는다. 모두를 부둥켜안으며 그리부예의 부드럽고 펄럭거리는 귀와 엉키는 순간, 따뜻한 바게트 빵 같은 귀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닫는다. 이것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최대의 거리,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깊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임을……. --- p.319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책을 쓰기 이전의, 당나귀와 여행하기 이전의 내가 아니다. 당나귀와 함께 한 여행은 내게 시간과 공간, 푸르고 흰 공간을 주었고, 내 삶을 돌아보게 해주었으며, 유령을 떨쳐내고 과거의 일들을 모두 지난 일로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이제 내 앞에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운이 좋다면, 모레도 있을 것이다. 더한 미래는 생각할 수 없다. (……) 내 등은 여간한 채찍질에는 더 이상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 영원한 순간을 발견하고, 유지하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투쟁은 스피노자가 경고한 대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지만”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전적으로 나와의 투쟁, 내 안에서 일어나는 투쟁, 나와의 영원한 대화이며 이제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pp.337~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