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베레모가 지프에서 내려 우리 쪽으로 걸어온다. 얼굴이 꼭 가면 같다. 나는 그의 검은 혁대와 가죽 권총집에 든 권총과 육중한 군화와 번쩍이는 선글라스를 주시하고 있다. 그의 눈은 보이지 않고, 대신 그의 선글라스에 비친 내 모습만 보인다. 선글라스에 비쳐 작고 굴절된 모습이긴 해도, 제법 투지만만한 사내아이가 파란 반바지에 흰색이 누렇게 바란 학교 셔츠를 입고 먼지 속에 서 있다.
“너, 왼발 슛이 제법이던데. 공 이리 줘 봐.”
붉은 베레모가 나한테 말을 건다. 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지금 그의 선글라스에 비친 나는 잔뜩 겁먹은 모습이다. 입까지 벌어져 있는 상태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킨다.
펠로가 달려와서 그에게 공을 패스한다. 제대로 된 축구공은 아니다. 소가죽을 여러 조각 실로 꿰매 붙이고 그 안에 플라스틱을 동그랗게 말아 꽉 채워 넣은 공이다.
붉은 베레모가 내 공을 공중으로 던진 뒤 발로 찬다. 공이 쭈그러든다. 나는 이제 두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똥간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내 축구공을 단번에 망가뜨리다니!
“이 마을에 반체제 인사가 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붉은 베레모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하지만 나는 군인들을 믿지 않는다. 그의 질문에선 표범을 잡을 때 놓는 날카로운 덫의 톱니가 느껴진다.
“너희들 시합은 끝났다.”
그가 축구공을 짓밟아 공기가 쉭쉭 빠져나가게 한다. ---pp.16∼18
나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터지는 곳으로 기어간다. 군인들이 총을 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고 있다. 도망치다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 군인들은 정색을 하고 총을 겨누고 있다. 군인들 손아귀에 든 총이 꽝꽝거리며 기세 좋게 울리자, 총알이 흙, 담, 나무, 항아리, 의자, 그리고 사람들 몸으로 날아든다.
나는 그걸 지켜본다. 너무 두려워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총알에 반 토막이 난다.
절규와 공포가 난무해,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똥간 할아버지도 찾을 수가 없다. ---p.42
우리는 벌레들이 국경 초소의 높다란 조명 주위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어느새 베잇브리지에 밤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 공을 찬다. 공이 이 선수에서 저 선수로, 발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골대로 움직이자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바라던 대로 된다. 걱정도 없어지고, 불안에서도 해방된다. 나는 그 순간만 생각한다. 경기장 한쪽에서 그 옆으로 뛰어가고, 상대편 선수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고, 공이 날아오는 걸 계산하고, 우리 편 선수들이 다음에 어떤 플레이를 펼쳐야 하는지 예측한다.
이제 내 머릿속엔 어제나 그저께의 기억 같은 건 없다. 내일이나 모레만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 있을 뿐이다. 축구공이 있고, 선수들이 좌우로 뛰고 있고, 경기장 끝에는 골문이 있다. ---p.94
“이제 달려야 해요. 이곳은 동물들이 사는 곳이에요. 하이에나, 들개, 버펄로, 코끼리가 사는데, 최악은 사자도 여기 산다는 거예요. 줄지어 달려야 돼요. 가능한 데서는 서로 손을 잡고 있어야 해요. 끔찍한 장면을 볼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멈추면 안 돼요. 멈추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그냥 놔두고 갈 거예요.”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살핀다. 동물은 보이지 않는다. 덤불은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레녹스의 찌푸린 이맛살과 근심 가득한 눈빛을 보면 우리가 무척 위험한 곳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남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덤불을 살핀다. 나는 구투에서 있었던 거와 같은 공포의 냄새를 다시금 맡는다. (……) 우리가 떠나온 짐바브웨의 저 먼 숲 위로 해가 떠오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침 공기는 매미와 새 들의 날갯짓으로 분주하다. 하늘은 평소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오늘은 무더울 것 같다. 공원 덤불에 녹색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저 멀리 수사슴이 우리가 있는 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다.
“출발!”
레녹스가 말한다. 지금은 달려야 할 때다.---p.131
“그 사람들이 우리 보고 크웨레크웨레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외국인. 이방인. 이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인.”
그게 바로 나다. 이 나라에서 나는 외국인이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 왔고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런 말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혼자만 그런 게 아니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일자리를 얻으러 온 사람이 수천 명이나 돼. 그래서 코멜레 지역민들한테 곤란한 문제가 된 거야. (……) 코멜레 지역민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
“나라도 화가 났을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므 불행하다고 하는 건 왜 그런 거예요?”
“아, 그야 간단하지.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여기 온 사람들은 플라잉 토마토 농장의 노예가 되었거든. (……) 강을 건너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서 다들 잠자코 있는 거야. 그들이 죽도록 일하고 쥐꼬리만큼 월급을 받는 반면에, 코멜레 지역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돈도 못 받는 거지.”
“그래서 거버 감독이 월급을 자기 마음대로 주는 거군요. 50센트만 줘도, 우리는 감지덕지할 테니까요.”
그제야 나는 왜 사람들이 한밤중에 화가 나서 속삭였는지 알게 된다.---pp.162∼163
저 상자를 가져가야 돼요. 우리 형 거란 말이에요.”
나는 함석 상자를 가리키고 말하면서, 그 쓰레기 아닌 쓰레기 상자를 뻔히 본다.
“여기서 당장 꺼져!”
경찰이 나를 붙잡는 순간, 옆으로 누워 있는 사람 머리 모양을 본다. 팔하고 손 모양이 빅스 상자를 향해 뻗어 있다.
나는 주저앉는 것도 모르고, 주저앉는다.
나는 우는 것도 모르고, 운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비명을 지른다.
나는 형한테 가는 걸 막는 손들을 느끼지 못하고, 형이 있는 곳까지 간다. 얼굴을 바닥에 대고 돌무더기에 깔려 있는 형한테로.
이제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울음을 그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p.219
더 이상 관중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다. 나는 기억과 느낌의 땅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던 걸 모두 갖고 있다. 걱정도 없고, 오직 이 순간만 생각하면 된다. 공이 내 발 앞으로 굴러 온다. 공이 러시아 골문으로 자기를 몰고 가라고 부탁한다. 순간적으로 모든 게 떠오른다. 구투, 베잇브리지, 코멜레 마을에서 했던 경기들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
이제 이 데오의 마술을 선보일 순간이다.
나는 러시아 선수를 한 명 제치고 공을 보드에 튀긴 뒤 공중으로 날아오른 공을 머리로 컨트롤한다. 그대로 경기장에서 솟구쳐 오르며 오른발을 크게 휘둘러 강슛을 날린다. 슛은 완벽하다. 열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쏜 공이 똑바로 날아가 러시아 골키퍼를 지나 망을 뒤흔든다.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란다. ---p.286
작가의 말
200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생한 외국인 혐오증으로 인한 유혈 사태에서 한 남자가 불타 죽는 사진을 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불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어떻게 왔는지 알았다고 해도 그를 죽였을까?
그 질문에 대한 보다 정확한 대답을 찾기 위해 피난민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그들이 어떻게 우리나라로 들어왔는지 살펴보기로 마음먹었지요.
케이프타운에 있는 스칼라브리니 센터의 무료 급식소(www.scalabrini.org.za)에서 일하면서 주목할 만한 세 명의 짐바브웨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셔 분들라, 판탐, 그리고 라스타가 그들입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몇 시간이나 그들을 인터뷰했고,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난민 신분이라는 사실 말고도 세 사람 다 아버지가 없다는 공통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구마구마의 손에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무가베의 군인들이 총으로 쏴 죽였고, 마지막 한 사람은 에이즈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는데, 필사적으로 가족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이 돈이 없다는 점과 현재의 정치 상황을 감안하면 그들이 가족을 데려올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젊은이들은 현재 케이프타운의 거리나 고속도로 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라도 지내야 할 형편인데도, 그들은 웨스턴 케이프의 지방 정부가 만든 난민 수용소에서 사는 걸 거부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