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사화로 몰락한 문반 가문의 사형제 중 셋째였다. 이름 순신은 중국 삼황오제의 순(舜) 임금에서 따왔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고 21세 때 혼인한 이후 병학과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8세 때 처음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32세 때 식년 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무관으로서 승진과 좌천, 파면과 복직을 거듭하며 동구비보(현재 함경도 삼수)의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만호, 함남 병사 군관, 건원보(현재 함북 경원)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현재 함북 경흥)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선전관에서 정읍 현감으로 그리고 1591년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1593년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조정을 기망하고 왕명을 어겼다고 해서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고 투옥, 고초를 겪었다. 정유왜란의 와중에 옥에서 풀려나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같은 해 7월(양력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궤멸 상태에 이르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두 달 뒤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선조 37년(1604) 1등 선무공신에 책봉되었고, 인조 21년(1643)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2년 뒤 [난중일기]를 포함해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되었다.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이다. 호는 노산(蘆山)으로 190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현대 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 ‘봄처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호남신문사 사장, 대구 청구대 교수,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한민족문화협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영남대 교수 등을 지냈다. 언론, 학술, 사학 방면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충무공 연구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1960년대 한학자들과 함께 [이충무공전서] 국역 작업에 참여했다. 전서본과 친필 초본을 합쳐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아 펴낸 [난중일기]는 이후 나온 모든 국역본들의 바탕이 되었다. 역주해본 [난중일기]와 함께 저서로 [노산 시조집], [조국 강산] 등 시조집과 [이충무공 일대기], [조선 사화집], [민족의 맥박], [노변필담], [피어린 육백 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