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적으로 사태를 진척시킨 것은 철학적 인식론의 영역에서 칸트가 이룬 작업이었다. 칸트는 경험적인 재료가 없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지식에 내용을 제공하는 것은 감각이며, 인간의 지성은 지식의 형식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어떤 관찰자도 없었던 때의 일들을 증언하는 창세기 1장의 본문, 어떤 사람도 감각적인 자료를 수용한 적이 없는 그런 일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1장의 이야기가 지니는 과학적 가치를 의문시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과학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창조론이라는 신학적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같이 교회를 염두에 두는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창세기 1장을 바른 빛 안에서 본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을 과학이라는 특수한 문제의 해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신학자들이 기독교 교리의 내용 전체를 관통하여 숙고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도구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이해되는 “실질적인(material) 원리”는 그 자체로 기독교인들이 구속의 경험으로 삼는 지성과 심성의 움직임에 속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 자신은 “절대의존의 감정” 안에 있는 이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속을 통해 수정된다고 보았다.
---「편집자 서문」중에서
20세기에 일어난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은 두 명의 칼(Karl)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한 명은 우리가 삼위일체론 사상을 통해 지금 막 만났던 칼 라너이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우리가 살펴볼 스위스의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다. 삼위일체 신학에 미친 바르트의 영향은 확실히 방대하며, 신학적인 풍토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1931년에 자신의 저술 계획을 밝히면서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이 『교회교의학』의 기초와 중심이 될 것이라고 공표했을 때, 그는 자유주의적 개신교주의의 비(非)삼위일체론적인 흐름에 의도적으로 저항하는 중이었다. 그 당시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 오래되어서 과거에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유용성은 다 소진되었다고 간주되었고, 정중한 무시가 삼위일체론을 기독교적 담론의 변두리로 밀어내고 있었다. 무리수를 두듯이 삼위일체론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때, 바르트는 로마 가톨릭의 반동적인 고백주의자와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무리의 조언을 받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교회교의학』의 첫 권에서 바르트는 “역사적?형식적?내용적으로 자신이 스콜라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는 비난”에 노출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분명히 초기 교회의 교리를 어떤 의미에서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삼위일체론은 물론 동정녀 탄생의 교리도 명시적으로 다룬다. 마지막의 동정녀 탄생만으로도 작금의 많은 동시대인들이 나를 가면 쓴 가톨릭주의자로 의심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제3장 “삼위일체”」중에서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기원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경이롭게 만들어졌고, 신적인 은총 안에서 풍요롭다. 정돈된 것이든 다스리기 힘든 것이든 인간의 삶은 그런 자연세계로부터 은혜와 선물을 매일 아침마다 받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현대에 그 교리에 대한 도전은 심각했다. 하지만 강인하고 유연하고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은 교회의 선포를 위해 그 교리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창조론의 위대한 과제는 하늘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론은 이 시대 그리고 모든 시대의 교회가 그분의 영광에 대해 올려드리는 찬양의 노래다.
---「제5장 “창조”」중에서
옛 신학들이 섭리에 대한 신앙을 기독교적인 성향(disposition)을 산출하는 하나님의 객관적 행동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현대신학은 특징적이게도 어떤 객관적 지식의 접촉에 대해 덜 확신한다(덜 현실적이다). 그 결과 현대의 접근방법은 믿는 자들의 역량과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임재와 활동을 판단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토론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20세기 초엽의 자유주의 개신교의 역사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가 그 경향을 잘 보여준다. 트뢸치는 “세계에 대한 학문적인 설명”과 섭리 신앙 사이에 날카로운 대조를 이끌어낸다. 섭리 신앙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신앙이고,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객관적 지식에 근거해 있지 않다. “신앙이 세계에 대해 갖는 절대적 목적론은 자연과학의 목적론적 개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섭리 신앙을 (주관적) “태도”로 환원시키는 것은 기독교 교리를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을 원용했던 지난 세기 중엽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흔한 추세였다.
---「제9장 “섭리”」중에서
이와 같이 현대의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자신이 윤리적으로 몰두하는 문구들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개념을 찾는 중에, 점차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 토론에다 어떻게 기독교 윤리학의 독특한 내용을 더할 수 있을지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기독교 윤리학 분야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기념비적인 공헌은, 친근했던 기독교적 언어의 상실이 어떤 독특한 기독교적 생활 양식의 상실과 함께 엮여 있다는 당연한 귀결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확신이 기독교인 혹은 비기독교인 모두에 대해 능력을 상실하게 된 이유는 많은 기독교인들, 특별히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교회가 세상에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것에 대해 도전하고 명확하게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우어워스가 제시한 사상의 개념적인 틀을 어떻게 판단하든지 간에(이 문제는 마지막 단락에서 다룰 것이다), 그의 증언이 기독교 윤리학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궤적에 대한 생생한 통찰을 실시간적으로 제공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제12장 “기독교 윤리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