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몸이 쑤신다. 이렇게 말해봤자 진짜 고통은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뼈끼리 부딪히며 닳아버릴 것 같은 신체의 고통에 딱 들어맞는 표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기억이란 놈은 해묵은 사진 같아서 훨씬 고약하다. 어느 때의 기억이든 일단 떠오르기 시작하면 잠잠하던 다른 기억들까지 깨우려드니 기를 쓰고 막아야 한다. 내게는 오직 이 순간만이 있는 것처럼, 당장 한 발을 들어 다른 발 앞에 놓으며 지나가야 한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반드시, 내 이야기를 하려면, 기필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란 놈은 어마어마하게 집요하다. 아무리 저항을 한들 기어이 내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그런데 그런 애가 진짜 있었나? 그런 곳도 진짜 있었던가?
나뭇가지에서 나뭇잎 하나가 금화처럼 떨어지던 순간을 다락방 창 너머로 지켜보던 나무가 내려다보이던 집과 골목과 내가 사랑했던 그 애와 함께 한 세상이…….
--- pp.15~16
거리로 뛰쳐 나왔다. 햇살이 내 얼굴을 비췄다. 지금 내 가슴에 다윗의 별은 없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난 자유인이다. 한 시간만이라도 더 있다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낯설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 누구도 별을 달고 있지 않은 내게 연민의 눈빛 따위를 보내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조차 잊고 지냈다. 걸음을 멈추고 식수대의 물을 마셨다. 엄마가 보면 기겁할 것이다. 이대로 발각되면, 체포되어 죽거나 어딘가로 보내질 수도 있다. 그래, 난 식수대에서 물을 마신 유대인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아닌 자들도 감염시킬 수 있다, 하지만 무엇으로?
도대체 우리 유대인이 뭐 그리 사악하다는 걸까?
“멋진 아침이야!” 지나가던 여자 분이 내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욕을 해댔다.
--- p.25
“왜 저분들이 우리를 계속 보호해야 하죠?”
내가 불쑥 물었다.
프랭크 아저씨는 날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고 나서야 나직하게 대답했다.
“글쎄다. 나한테서 월급을 받고 있는 것도 약간은 이유가 될 테지.”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내 말은 그것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거란다. 그렇지 않겠니, 피터? 먹고 사는 문제가 사소하다면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평생 동안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 아닐까? 물론 그보다는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 느끼고, 그런 잘못된 판에 자신들이 끼고 싶지 않은 게 더 큰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게다가 자신들이 할 수만 있다면 이 전쟁까지 멈추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겠고.”
“하지만 저분들한테는 아무 영향이 없잖아요? 저분들이 유대인도 아니잖아요?”
내 질문에 아저씨가 미소 지었다.
“유대인만의 문제는 아니잖니, 피터? 나치가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지. “
--- pp.82~83
그들은 운하 바로 옆을 걷고 있었는데, 꽤나 가까워보였다.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네와 나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움직이는 게 겁이 났다. 돌연 누군가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고 시커먼 창문 뒤쪽에 서 있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챌까봐 두려웠다.
한 아이가 울어대자 대열 속에서 걷고 있던 한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여자의 한쪽 팔엔 가방이, 다른 팔엔 아이가 들려 있었다. 한꺼번에 둘 다를 들고 갈 수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경비대원은 여자를 밀면서 윽박질렀다. 여자가 가방을 놓고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들이 지나간 거리는 적막했다. 여자의 가방만이 덩그마니 길바닥에 모로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 안네의 입김으로 유리창도 뿌예져 있었다.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어스름 속에서 누더기를 걸친 깡마른 사내애가 나타났다. 그 애는 여자의 가방을 열고 양초를 빼낸 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꺼내기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가방을 두고 서로 밀치고 싸워대는 아이들로 부산스러워졌지만, 다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애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 나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잠깐 사이에 제각각 흩어져 다시 거리는 적막해졌다. 어느새 길바닥에는 빈속을 다 드러낸 가방만이 독수리 부리에 쪼인 비둘기 시체처럼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한 남자가 배에서 내려 그 길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 pp.112~113
“난 사람들도 알아주길 바라는 거야, 피터. 난 그들도 우리가 느낀 것을 느껴보길 바라는 거라고. 공포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이 어떤 건지, 자신들이 포근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창밖을 내다보며 같은 민족 사람들이 끌려가는 걸 바라봐야 했던 우리 심정이 어떤 건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심정이 어떤 건지, 죄다 알려주고 싶은 거라고. 그들이 안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느낀다면, 다시는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거 아냐, 안 그래?”
--- p.325
“내가 왼쪽이라고 말했지, 병신아!”
나이 지긋한 남자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눈두덩에서 피가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가 무기력하게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경비대원이 그를 때려눕히고 쓰러진 그의 등짝을 군홧발로 밟아댔다. 페퍼 선생님이 한 발 앞으로 움직이려 하자, 프랭크 아저씨가 재빨리 뒤로 잡아당겼다. 경비대원은 쓰러진 남자 옆에 있던 사람을 쳐다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남자의 아들인 듯했다. 모든 일이 삽시간에 일어나 아직도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인데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 즉시 그 아들이 반사적으로 경비대원을 향해 주먹을 빠르게 휘둘렀던 건 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다. 퍽 소리가 났다. 동시에 경비대원의 목이 뒤로 휙 꺾였다. 제대로 한 방 맞은 경비대원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그 사이에 남자의 아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싸움 자세를 취했다. 잠시 뒤, 몸의 균형을 되찾은 경비대원이 총을 꺼내 남자의 아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플랫폼에 쓰러져 있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울부짖기 시작하고, 또 다른 경비대원은 그에게도 총질을 해댔다.
줄무늬 옷을 입은 민둥머리들이 허리를 굽히고 죽은 두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입까지 벌려 안쪽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차간의 악취와 정적을 찢고 우리 눈앞에 날아든 총소리와 놈들의 명령소리 때문에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p.376
“봐라. 놈들이 내게 두 그릇을 줬다. 여기 봐라, 피터야. 이건 네 것이야. 네가 먹어야 한다.”
아빠가 흥분하며 말했다.
왜, 왜, 어쩌자고 놈들이 아빠에게 더 줬을까? 난 주위를 둘러봤다. 아빠만이 아니었다. 회교도와 노인들과 쓸모없어진 사람들이 두 그릇을 받았다. 그들도 왼쪽으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도 뽑힌 게 분명했다.
“안 돼요.”
내가 말했다.
“아빠가 드세요.”
하지만 아빠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내 말을 들어라, 피터야. 지금 네가 이걸 먹지 않으면 네 엄마가 날 죽이려 할 게다. 생각해 보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는 없었다. 난 머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 p.407
난 미소를 지었다.
“이 애가 웃었어요!”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중이겠죠, 그렇죠?”
“우리들도 여기서 벗어나면 그렇게 되지 않겠소?”
엄마가 두 팔로 날 끌어 올렸다.
“거의 다 왔어. 이제 거의 다 왔어.”
안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
“잘했어, 피터. 고생했어. 그래, 다 끝났어.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 거야.”
모든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눈에 덮인 메르베데플레인의 들판과 여름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사위어든 햇살에 눈부시던 꽃들과 떼 지어 뒤뚱거리던 거위들이 보였다. 이어서 반짝이는 별들이 꽉 들어찬 네모반듯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던 낙엽처럼 조그만 입술이 보였다. 그 입술로 단어들을 쏟아내던 안네의 모습도 생생하게 보였다.
“피터? 이제 저 놈들도 우리 이야기를 날려 보낼 수는 없어.”
안네의 목소리야.
안네의 일기장에서 떨어져 나온 종이들이 은신처 마룻바닥에 낙엽처럼 흩어져 있는 장면도 보였다.
내 몸도 어느덧 낙엽 한 잎보다 가벼웠다.
이제 준비가 끝났다.
--- pp.438~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