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여느 때처럼 호박밭에 누워 있자니, 누군가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눈만 움직여서 주위를 보았다. 주위에는 호박 이파리, 위로는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어!” 하고 바로 옆 풀숲을 보니, 여치가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와 여치가 서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여치를 발견하는 비법을 깨우쳤다. 여치는 찾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찾으면 찾을수록 잡을 수가 없다. 가만히 조용하게 자연 가운데 있으면, 여치란 놈이 만나러 오는 것이다. 나에게는 대발견이었다. 이 발견을 누구에게 가르쳐 줄까. 나는 호박밭에서 뛰어나왔다. 빨리 친구들이나 사촌들에게 ‘비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니까, 또 하나 걱정이 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여치를 발견하는 ‘비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비법’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내 몸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되고, 더불어 여러 가지 ‘언어’를 익혀서 내가 깨달은 ‘비법’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 본문 23쪽
외삼촌이 전쟁 전부터 철공소를 하고 있었다. 아주 멋진 외삼촌으로, 일을 찾고 있던 내가 상담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래, 히로시, 여기로 와라.”
나는 외삼촌의 철공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외삼촌은 내가 철공소에서 일하는 것을 아주 반겼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내게 사업을 맡기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철공소에서는 체육관이나 라이스 센터, 무도관 등 커다란 건물의 철골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단히 일을 잘해서 평판도 높고, 곧잘 작업을 의뢰받았다.
기술자가 서너 명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지거나 커다란 망치를 휘두르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일을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서,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대단히 우람했다. 반면에 나는 어땠느냐하면, 2년간 재수생이었던 탓에 피부도 하얗고 몸매도 호리호리했다. 체중이 겨우 48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 ‘아르바이트’ 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기술자 수업이다.’라고 마음먹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다.
- 본문 35쪽
“자연과 관련된 일을 해 볼까.”
하지만 아직은 ‘그것’이 어떤 일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산에서 일하는 임업도 좋겠지.”
그저 막연하게 이런저런 생각만 떠올랐다.
변함없이 도서관에는 다녔다. 그즈음에는 화집이나 기법에 대한 책뿐 아니라, 논픽션에서부터 소설까지 폭넓은 장르의 책을 읽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체험과 인생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독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비로소 생각했다.
“뭐지, 이 책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 한 권을 손에 넣었다. 1930년 즈음 혼슈에서 태어나 홋카이도로 이주해 온 젊은 신문 기자 혼다 가쓰이치가 쓴 『북쪽 나라 동물들』이라는 책이었다.
사냥꾼에게서 듣고 쓴 그 책은 큰곰이나 우는토끼, 북방여우, 에조사슴 등 홋카이도에 옛날부터 살았던 동물들과 사람들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그중에 에조늑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뭐? 홋카이도에 늑대가 있었다고?”
『북쪽 나라 동물들』에 따르면, 홋카이도에 에조늑대가 살았는데, 소나 말 같은 가축을 습격했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 중엽 방목 정책과 함께 인간이 의도적으로 멸종시켰다는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늘어서 있는 도서관에서 책꽂이에 조용히 꽂혀 있는 그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내 안에 자연 사물을 향한 안테나가 끊임없이 움직인 덕분에 몸이 반응해서 쓰윽 눈에 들어온 게 아닐까.
집에 돌아와 바로 읽기 시작했다. 자연에 대해 꽤 지식이 있다고 지금껏 생각했지만, 늑대가 홋카이도에 살았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읽는 사이에 왠지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동물과 관련된 일도 있구나…….”
‘동물원 사육사다.’
나는 갑자기 그렇게 결정했다.
- 본문 44~45쪽
인간은 예전부터 생김새 때문에 고릴라를 무척 무서운 동물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고, 오랜 세월 동안 박해했다. 고릴라는 분명히 몸집이 크고 풍모가 무섭다. 그런 겉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잘 보면, 오목눈에 아주 작고 귀여운 둥근 눈동자를 지닌, 다정스럽고 인상 좋은 얼굴이다. 암컷 고릴라의 얼굴은 온화하다. 사육사로서 깊이 접촉하면, 고릴라가 대단히 상냥한 생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사히야마 동물원에 처음으로 암컷 고릴라 마리가 왔을 때, 나는 서른 살이었다. 마키타 선배가 고릴라를 담당했다. 나는 선배가 쉬는 날에 고릴라를 돌보았다. 다음 해 수컷 고릴라 곤타가 왔다. 곤타는 다섯 살 정도로 이제 막 아이에서 소년이 되려는 참이었다. 고릴라는 유난히 예민해서, 가까운 데 공사가 있거나 처음 보는 동물이 앞을 지나가면 그다음 날 설사를 했다. 염소가 산보하면서 고릴라 우리 앞을 지나가도 설사를 했다.
고릴라 우리에는 흙이 깔려 있고 풀이 나 있고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어른으로 성장한 곤타는 그 바위에 걸터앉아, 멀리 아사히카와의 늘어선 집들이나 산을 보곤 했다. 곤타는 붉은 저녁 해가 산기슭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이따금 나는 그러한 곤타를 보았다. 침팬지도 고릴라도, 저녁 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여러 의미로 고릴라에게 철학이나 사유 방법을 배웠다.
- 본문 80~81쪽
동물원에 있을 때에는 ‘동물원이 왜 존재할까?’나 ‘동물을 어떻게 쾌적하게 살게 할까?’를 날마다 궁리하고, 동료들과 계속 의논했다. 결국 그것은 ‘생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연결된다.
‘생명’이라는 것, ‘살아간다’는 것, 그것에 대답하자면, 이제 나에게는 ‘그리는 것’이 되었다. 주위에 사는 지렁이나 하늘가재, 에조다람쥐나 올빼미 등의 생명에 대등하게 마주 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내게 ‘그림 그리는 일’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 ‘신기해서 두근두근하는’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거기에 열중하는 게 좋다. 온 힘을 다해 열중하는 시간을 보내자. 그렇지만 언젠가 그것에 대한 열정이 식을 것이다. 그러면 그걸로 됐다. 시들해졌다면 이번엔 또 다른 ‘흥미’를 찾아 열중하면 된다. 그래서 언제나 마음과 몸에 ‘흥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흥미를 받아들일 준비’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 하나는 책을 읽는 것이다. 동서고금 앞서 간 사람들이 써서 남긴 책에는 많은 ‘답’이 가득 쌓여 있다. 반드시 우리 질문에 답이 되는 힌트가 있다. 나는 젊었을 때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림 그리는 법에 관한 책, 자연에 관한 책, 늑대에 관한 책을 만났다. 그리고 동물원 사육사가 되고, 지금은 화가가 되었다. 책은 ‘길잡이’가 되었다. 다른 것도 있다. 스포츠, 음악, 여행, 영화, 만담, 미술관…… 많이많이 있다. 무엇이든 ‘흥미’를 발견해 열중하면서 마음속에서 따뜻하게 키운다.
그리고 어른이 될 무렵,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반드시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늘 ‘흥미’의 안테나를 활짝 펼쳐 놓자. 어느 날 그 안테나에 무언가가 걸려든다. 그러면 “이거로구나!” 하고 알게 된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자. 그때에 바로 두근두근한다면 ‘기쁘다’, 지금 ‘살아가고 있다’라고 느낄 것이다.
- 본문 150~151쪽
아베 히로시의 그림책은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되 우리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동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색이다. 더불어 의성어며 의태어, 하이쿠를 풍성하게 쓰는 발랄한 언어 감각도 주목할 만한 특색이다. 여기에도 어렸을 때 백인일수 카드놀이에서 익혔던 언어 감각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림과 시가 하나인 백인일수 카드놀이가 그에게 뼛속 깊이 언어 감각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경쟁이 심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하는 요즘, 청소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베 히로시는 청소년들에게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책을 폭넓게 읽어 관심사를 넓히고, 자신이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흥미의 안테나’를 활짝 열어 놓고, 그때마다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일을 잘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해 보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또 다른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가장 우선일 테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고,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베 히로시와의 만남은 나에게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내 생명과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용기 있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옮긴이의 말 158~159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