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어디서 얻는지 질문을 받을 때에도 나는 시시때때로 바뀌어 실체가 없는 영감을 무어라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대신 단서와 재료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디어가 필요한 상황에 놓이면 내가 맞닥뜨린 미션에서 단서를 찾고 그것에 내가 가진 재료를 더하는 방식으로 창작이란 것을 해냈다. 재료는 언제나 기억에서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보고 들었던 것들이 힘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건 위로처럼 들리기도 한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결코 0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니까. --- p.35
주차장에 물이 새는지 누군가 받쳐 놓은 우산 통이 여러 개 있었고 주차장 가득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져 아름다웠다. 어떤 통은 가득 찬 물이 아슬아슬 넘실거렸다. 나는 물의 부력에 감탄하며 그 장면을 영상으로 남겼다. 만약 내가 영상을 찍는 동안 물이 넘치면 이번 주에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주문을 걸어 봤지만 물은 결국 안 넘쳤다. 나는 이 기억을 잘 보관했다가 언젠가 써먹을 것이다. 물이 영원히 넘치지 않는 쪽으로 혹은 우산 통에 구멍이 뚫린 쪽으로. 아무튼 간에 재밌는 쪽으로 기억하고 바꾸고 더해서 어디에든 잘 써먹을 것이다.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 p.36
그의 작업실에 작게 나 있는 창문을 상상하고, 창문 앞에 놓인 도구들을 상상하고, 물감으로 여기저기 물든 작업실 바닥을 상상하고,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먹다 남은 음식들을 본다. 그리고 그의 붓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사진으로만 본 작가의 생김새가, 그의 마른 체형이, 골똘한 표정이 그제야 그려진다. 왜 여태 이 생각을 못 해 봤을까. 작가의 시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는 그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p.82
언어는 부실해. 그 너머의 것을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자. 그리고 열심히 알아채자. 말 아닌 말들을. 손에 잡히지 않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건반에 없는 음 같은 것들을. --- p.165
가끔은 내가 작업하는 이미지나 공간에 문과 창문을 많이 배치하는 방법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도 그 너머의 공간을 생각하곤 하니까. 여지없이 문고리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곤 하니까. 나는 문이나 창문을 그려 넣은 덕에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공간들을 공짜로 얻는 효과를 누린다. 더 크게, 더 재미있게, 더 새롭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말 아닌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많다. 이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뜨거우면 촌스러운 것이 된 세상에서 김지원은 아직도 뜨겁게 사랑할 것이 많아서 꿈과 일, 언어와 위트, 나와 친구 같은 것들을 품에 안고 하루 종일 들여다본다. 나를 잊을 만큼 몰두하는 것, 내 운명을 내어 주고 헌신하는 것, 아낌없이 순정을 바치고 싶은 것들이 김지원에게는 그렇게나 많다. 김지원은 사랑 그 자체도 사랑한다.
습관처럼 퇴사를 상상하고 적게 일하고 많이 벌라는 덕담이 오가는 세상에서 김지원은 여기저기 긁혀 가며 어떤 형태로든 창작-작업-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창작과 그 과정을 자식에게 처음 교복 입힌 부모님의 눈으로 쳐다본다. 김지원의 글에서 20년 전 내 부모님의 그 눈빛을 다시 느낀다. (후략)
- 문상훈 (크리에이터, 배우)
지원과의 대화를 항상 좋아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재미있고, 이상하고, 꿈꾸는 것 같다가도 지독하게 현실적인 그와의 대화는 날 항상 깨워 주었다. 글을 읽는 내내 보광동 어둡고 귀여운 곳에서 와인 병을 쌓아 가며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자기 길을 묵묵하게, 촉촉하게 걷는 그를 꼭 닮은 덤덤한 문장들에 오늘도 위로를 받는다.
- 김민하 (배우)
책을 읽으며 김지원의 면면들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만큼 진솔하게 자신을 담아냈다는 뜻일 테다. 어떤 방식으로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은 용기 있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미술과 영상을 만들어 내는 감독으로, 이제는 한 사람의 작가로 그 일을 멈추지 않는 김지원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너무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편안한 모습으로 누군가의 잠재력을 먼저 알아봐 주고, 응원하고 격려하며 빛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그에게 배울 것이 참 많다. 앞으로도 김지원이 창작 활동을 계속해서 할 수 있기를, 사람들에게 좋은 영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