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그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진 ‘파이프’가 처음 등장한 〈핵 10〉(1968)P. 050은 1968년 4월, 제12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된다. 하얀 바탕과 검은 화면의 대치는 마치 수평선에 걸린 일출의 빛처럼 어둠과 밝음, 어떤 세계의 사라짐과 피어오름을 상기시키는 조화의 아름다움이 있다. 대비되는 널찍한 두 면 사이에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의 경쾌한 색띠들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화면을 분할하는 연속적인 색띠들 사이로 선명한 입체감의 하늘색 원기둥이 드러난다. 부피감으로 드러나는 이승조의 ‘파이프’는 분절하는 색과 형태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 것이다.
--- p.9~10, 「도열하는 기둥: 당도하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이정윤(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중에서
〈핵〉 연작의 한 점 한 점은 모더니즘적 열망이 소용돌이치는 원심력을 지닌다. 이 열망은 인간이 만들어낸 일상적인 물건들이 내포하는 구질구질한 생명력을 둘러싼 일말의 자율성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이 “파이프들”은 힘과 움직임을 생산하기 위해 설계된 정밀 시스템에 적합한 공기압 실린더의 형태와 기능을 가진다. 미술비평가 김인환은 이를 두고 “파이프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서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색띠, 선, 볼륨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연상으로 전화(轉化)”시킨다고 썼다. 이승조는 세심하게 절제된 재료, 색채, 구성적 전략, 형태를 통해 작업을 생동하는 역장 속 모든 에너지가 흘러 넘치는 추상으로 이끌었다.
--- p.15, 「역장들, 조앤 기(Joan Kee, 미시건주립대 미술사학과 교수)」 중에서
1960년대 초 홍익대학교에서는 오리진 외에 ‘전위’의 이념을 내세 운 동인 그룹의 결성이 붐을 이루었다. 이승조와 1960년 입학 동 기생들이 오리진을 결성하던 1962년에는 이들보다 한 학년 위인 1959년 입학 동기생들이 ‘무동인( 無同人, Zero group )’을 결성하 고 창립전을 열었으며,7 1964년에는 1961년 입학 동기생들이 ‘논 꼴동인’을 결성하여 이듬해 창립전을 열었다.8 이들은 1950년대 말 앵포르멜 화풍으로 제한적인 근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운 한국 현대미술의 수립을 주창한 선배세대에 기꺼이 공감하면서도, 1960년대 들어 급속히 확산되며 빠르게 시효를 상실한 앵포르멜 의 한계를 극복하여 전위를 쇄신할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 p.31, 「이승조, 한국 현대미술의 도관(導管), 권영진(미술사학자)」 중에서
이승조는 우리 화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종일관하여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를 추구한 화가이다. 그리고 그 추상 세계는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그 전개는 초기의 이른바 ‘파이프’의 착시적 입체 구성에서 일체의 대상성이 배제된 순수 조형의 세계에로 귀착하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적이 있다.
“나를 ‘파이프 통의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별로 원치도 않고 또 싫지도 않은 말이다. 구체적인 대상의 모티프를 전제하지 않은 반복의 행위에 의해 착시적인 물체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현대문명의 한 상징체로서 등장시킨 것도 아니다.”
이승조의 추상회화 세계가 애초부터 그 어떤 대상 세계에도 출발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확고한 순수조형의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추상 세계이다.
--- p.235,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한 전형-이승조 회고전에 부쳐(1991), 이일(미술평론가)」 중에서
이 글은 이승조의 작업이 미국 예술가들의 활동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내려는 목적을 가지며, 그러한 관점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할 것이다. 나는 나의 개인적 배경─20년 가까이 미국에 거주한 아시아 현대미술 전문 큐레이터─에 비추어 한편으로는 한국을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한 이승조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동료 예술가들과의 연계성을 부각시켜 양자를 평행선상에 배열하고 싶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 글은 이승조의 작업이 국제적인 운동, 특히 미국에서 일어난 움직임과 얼마나 동시적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이승조의 작품과 그에 상응하는 미국 작가들의 작품 간의 비교 지점들을 제시하는 형식을 띤다. 미니멀리즘이 국제적인 운동이었으며, 이승조의 회화 작업을 보다 면밀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이 미니멀리즘과 확연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 p.239, 「양감의 회화, 멜리사 추(Melissa Chiu, 허쉬혼미술관 관장)」 중에서
이승조의 추상도 뒤늦은 감은 있지만 1960년대 한국에서 그런 기계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기계미는 어디서 오는 걸까? 기계미의 핵심은 기계의 규칙성, 금속이나 플라스틱 같은 재질의 특성, 기능성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긴장에 있다. 기계는 최소의 재료로 최대의 효율을 내야 하며 다양한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 거기에서 긴장이 나온다. 그것은 결코 사람이 자의적으로 정할 수 없는 물질의 객관적인 법칙에서 나온다.8 이승조의 그림에는 그런 긴장감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승조는 기계미에 바탕을 둔 추상을 위해 그림에서 손짓의 흔적과 질감(혹은 마띠에르)을 제거해 버렸다. 이는 거친 마직의 캔버스에 짙은 황갈색의 물감을 흘러내리는 형상으로 그린 윤형근과도 다르고, 손짓을 강조한 박서보나 윤명로와도 다르고 물감 자체의 질감을 강조한 하종현 등 그의 동시대 화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 p.250, 「기계비평의 눈으로 본 이승조의 회화, 이영준(기계비평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