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의 용어법에 따르면 국가는 어떤 지역적 경계 안에 있는 조직된 인민(Volk)의 정치적 상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국가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결코 국가에 대한 개념 규정은 아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문제 삼는 경우에는 그러한 개념 규정은 필요하지 않다. 국가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기계인가 유기체인가, 인격인가 제도인가, 이익사회인가 공동사회인가, 경영체인가 꿀벌집단인가, 또는 혹 어떤 ‘기본적 절차’는 아닌가의 문제에 대해서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은 정의나 표상들은 모두 너무나 많은 판단, 의미부여, 설명, 해석을 미리 해 버리기 때문에, 단순하고 기본적인 논술에 적합한 출발점을 마련하지는 못한다. 국가란 그 말의 의미나 역사적 발생에서 본다면 인민의 특별한 상태이며, 더구나 결정적인 경우에는 결정력을 가지는 상태이며,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개인적ㆍ집단적 상태에 대한 절대의 상태이다. 여기서는 일단 이 이상 더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관념의 모든 표지-상태와 인민-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추가적인 표지를 통해서 의미를 획득하며,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오해되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pp.31-32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규준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을 제공하며, 빠짐없는 정의(定義) 내지 내용을 제시하는 개념 규정은 아니다. 다른 규준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구별은 도덕적인 것에서는 선과 악, 미학적인 것에서는 미와 추 등 다른 대립에서 보여지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규준들에 대응한다. 여하튼 이 구별은 새로운 고유영역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앞서 말한 하나 또는 몇몇 대립들에 근거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들에게 귀착시킬 수도 없다는 방식에서 독립적이다. 선악의 대립이 그대로 간단히 미추 또는 이해의 대립과 동일시되지 않고, 또한 곧바로 그와 같은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적과 동지의 대립은 더구나 이러한 대립들과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가장 강도 높은 경우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가지며, 상술한 도덕적·미학적·경제적 또는 다른 모든 구별을 그것과 동시에 적용하지 않아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쩌면 적과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적과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 충돌은 미리 규정된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도, 또한 ‘국외적이고’ 따라서 ‘공정한’ 제3자의 판결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다.--- pp.39-40
이와 같은 투쟁의 가능성이 남김없이 제거되고 소멸된 세계, 최종적으로 평화로워진 지구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없는 세계, 따라서 정치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도 아마 다양하고 매우 흥미로운 대립이나 대비, 모든 종류의 경쟁이나 술책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희생하도록 요구할 수 있고, 피를 흘리고 다른 인간을 살해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의미 깊은 대립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이와 같은 정치 없는 세계를 이상적 상태로서 바라고 초래할 것인지의 여부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 규정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현상은 오직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라는 현실적 가능성과 관련을 가짐으로써만 이해되는 것이며, 거기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어떤 종교적?도덕적?미학적?경제적 평가가 나오는지는 관계가 없다.--- pp.48-49
적과 동지의 구별이 사라지면, 정치생활도 없어진다.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국민은 서약적인 선언에 의해서 이러한 숙명적인 구별을 피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일부분이 더 이상 어떠한 적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적에 가담하고 적을 돕는 일이며, 이 선언으로 적과 동지의 구별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의 시민들이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왜냐하면 개인에게는 정치상의 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선언으로는 고작해야 현재 자신이 소속하고 있는 정치적인 전체집단으로부터 이탈하여 단지 개인으로서만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개별적인 국민이 전 세계에 대해 우호선언을 하거나 또는 자발적으로 무장해제를 함으로써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방법으로 세계가 탈정치화하고 순수한 도덕성, 순수한 합법성이나 경제성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한 국민이 정치적 생존의 노고와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그때는 바로 다른 국민이 대신에 그 노고를 없애 주고 ‘외적에 대한 보호’와 함께 정치적 지배를 떠맡게 될 것이다. 그때는 보호와 복종이라는 영원한 관계에 따라 보호자가 적을 규정하게 된다.--- pp.68-69
그동안 경제, 자유, 기술, 윤리, 그리고 의회주의라는 매우 복잡한 복합체는, 그 적수인 절대주의 국가와 봉건귀족주의의 잔재들을 오래 전에 청산하였고, 그 결과 모든 현실적인 의미를 상실했다. 이를 대신해 이제 새로운 결속과 연합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자유는 아니다. 기술은 쾌적함에 봉사할 뿐만 아니라 같은 정도로 위험한 무기와 도구의 생산에도 봉사한다. 그 진보는 그 자체로서 18세기에 진보라고 생각했던 인도적?도덕적 완성을 성취하지 못한다. 기술적 합리화는 경제적 합리화의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정신적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18세기의 이러한 역사해석으로 충만하며, 적어도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정식과 개념들은 오래된 적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pp.101-102
슈미트의 과제는 자유주의의 좌절이라는 사실로 인해 생겨나게 된다. 자유주의의 좌절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했지만, 그로써 정치적인 것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폐했을 뿐이다. 자유주의는 반정치적인 담론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말살해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말살해 버린 것이다(65 ff. [본서 87쪽 이하]). 자유주의가 가져온 현실의 은폐를 없애기 위해 정치적인 것은 그것 자체로서, 또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제시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자유주의에 의하여 초래된 그 은폐로부터 우선 명백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럼으로써 국가에 대한 질문이 명확하게 제기될 수 있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