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총을 쏠 놈이었으면 진작 쐈지. 그깟 쓰레깃더미나 페인트를 들이붓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깟 쓰레깃더미라고 했습니까?”
결국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 치우고 페인트 지우는 데만 얼마나 들었는지 아느냐고 태오는 소리쳤다. 그렇게 태평하게 있다가 당하지 말고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도 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걱정과 조바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삼십여 년 전 타운을 휩쓸고 간 태풍을 잊은 사람은 없으니까. 모든 것을 잃은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 p.10
“아악!”
여자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흑인 남녀가 쓰러진 여자의 다리를 밟아 뭉개고 있었다. 태오가 옆에 있는데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반사적으로 여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태오가 그들을 힘껏 밀쳤다.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여자만이 뒤로 약간 밀려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슨 짓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외치던 태오 역시 어느 순간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Kung Flu.”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들으며 태오는 의식을 잃었다. 그의 머릿속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스크린처럼 정신이 없었다. 인과를 알 수 없는, 장면이 뒤엉킨 이상한 영상으로 범벅이 되었다. 태오가 눈을 떴을 때 흑인 남녀는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 p.16~17
그때마다 그는 마른걸레와 소독액이 담긴 통을 들었다. 출입문 손잡이와 자잘한 물건이 정리된 선반과 계산대에 소독액을 뿌리고 마른 수건으로 여러 번 문질렀다. 아무리 뿌리고 닦아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의 청결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미세먼지가 폴폴 날리는 마당에 서 있는 것처럼 껄끄러운 느낌. 그때마다 태오는 화장실로 가 비누칠한 손을 세심하게 문질렀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 손톱 밑까지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언뜻언뜻 묻어두고 싶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거대한 몸을 가진 두 남녀가 여자의 다리를 짓이기는 장면과 태오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모습, 흑인 여자가 퉤퉤 침을 뱉으며 돌아서던 모습도 보였다. 침 멀리 뱉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흑인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침을 뱉었다.
--- p.18~19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어느 순간부터 그 주먹은 조금씩 커져 태오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날부터 태오는 되도록 창밖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무 뒤에서 건물 모퉁이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차라리 마켓 문을 열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루 매출이라야 몇십 달러에 불과한데 종일 이렇게 앉아 불안과 불편을 떠안을 이유가 무엇인가.
--- p.20
그는 일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참는 거라는 걸 일찍 깨달았다. 열다섯 살에 은평구를 떠나 남의 나라에 왔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고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더이상 태오가 아니었다. 거지였고 작은놈이었고 노란 애였다. 억울하다고 울 때 가장 약한 자가 되는 세상의 이치도 그때 알았다. 새삼스럽게 이유 없는 폭행이 억울하다고 신고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오십 년 넘게 살아온 동네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신고는 신고로 끝날 뿐이라는 것도 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모두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자고 하지만, 그런 일은 또 일어날 것이다. 당장 오늘 저녁 어느 집 문 앞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 p.21~22
탕! 여지없이 총소리가 났고 이번에도 간판을 쏜 것 같았다. 별일이 없다면 경찰은 십 분 내에 올 것이었고 그때까지 자신은 기다리면 되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또한 쉽게 마트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태오는 땀이 찬 손을 닦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봤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p.33
아버지의 인생 목표는 사관생도의 아버지였다. 단정한 생도복, 턱을 들어올리게 하는 생도 모자, 번쩍이는 견장을 달고 마을 진입로로 늠름하게 걸어들어오는 큰아들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그리던 미래였다.
--- p.41
아버지는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게 되면, 당신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가족을 태우고 집안 어른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소원이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친척들이기는 하지만.
“남북 정상들이 만났잖어. 뉴스에서 너도 보고 나도 봤는데 왜 그걸 안 믿냐?”
--- p.42
“내가 떨어지는 이유는 딱 하나야. 돌발.”
불시에 멈추어야 하는 코스, 돌발상황이 제시되면 그때부터 아버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번번이 떨어지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디 돌발뿐이겠는가. 나 역시 세 번의 도전 끝에 면허증을 땄는데. 아버지의 고충을 완전히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아버지의 면허 시험에는 두 가지의 ‘오직’이라는 단서가 따라다녔다.
“엄마, 돌발도 처음에나 돌발이지. 벌써 열여덟 번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건 더이상 돌발이 아니라 일상이라고 해야 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엄마는 몰랐다. 다만 아버지에게는 늘 돌발이 문제였다.
--- p.44
그때 아버지는 겁이 나서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제대도 했는데, 인솔자의 계급장을 본 순간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잃어버린 두 개의 손가락에 대해서도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견장을 보는 순간 번듯함, 명예로움, 자부심, 권력 같은 말들이 떠올라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겨우 그 한마디를 하고 인솔자의 사무실을 나왔다. 군인들이 훈련하는 연병장을 지날 때, 뙤약볕에 머리가 타버릴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동안 할머니의 고무신에서는 땀이 차 쩔꺽이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다행히 할머니도 아버지도 울지 않았다.
--- p.62~63
“박수 받는데 그걸 좋다고 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르겠더라. 저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것도 같았다가 한편으로는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도 같은 게. 마음 한편에서는 손가락을 변상해달라고 하라고 꼬드기는 말이 들렸지만,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고 번듯하게 얼굴도 내밀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또 하겠냐. 그 박수 소리가 이제 그런 건 잊어버리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았지.”
---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