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옛 노래들은 뜨겁고 옛 노래들은 비장하고 옛 노래들은 서러워서 냉소적인 모든 세계의 시간을 자연신의 만신전 앞으로 데리고 갈 것 같기에, 좋은 노래는 옛 노래의 영혼이라는 혀를 가지고 있을 것 같기에, 새로 시작된 세기 속에 한사코 떠오르는 얼음벽, 그 앞에 서서 옛적처럼 목이 쉬어가면서도 임을 부르는 곡을 해야겠다 싶었기에, 시경의 시간 속에서 울었던 옛 가수들을 위하여 잘 익어 서러운 술을 올리고 싶었기에.
2010년 겨울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중에서
옛날 인간에게 노래가 없던 시절
하늘에 있는 나무의 씨앗을 훔친 죄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시를 얻게 되었다는 한 부족의 신화
내 안의 신에게 첫 노래를 전한다.
2012년 3월
---「이은규, 다정한 호칭」중에서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
모르고 핀다.
아버지는 戰場이었다.
나는 그가 뽑아 든 무딘 칼.
그는 나를 사용할 줄 몰랐으므로
나는 빛나려다, 말았다.
56년 동안 ‘蘭中日記’를 써오다
지난 가을 잠드신
나의 아버지께 삼가, 시집을 바친다.
2012년 가을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중에서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2012년 12월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중에서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시는 시인의 말을 쓰다가 완성해버린 것이다. 하고 싶은 말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 단어가 바닥나버렸다.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2019년 4월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중에서
슬프고 끔찍한 일들은
꼭 내가 만든 소원 같아서
누군가 다정할 때면 도망치고 싶었다.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었는데,
스물의 나를
서른의 내가 닫고서
턱까지 숨이 차서 돌아가면
당신이 늘 없었다.
2020년 3월
---「최현우 ,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중에서
편지 아닌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해요.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2020년 4월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중에서
나는 듣는다. 듣다보면 그에게서 이런저런 감정이 흘러나
와 그의 얼굴을 적시고 그가 말을 멈추고 마침내 그가 시간
을 거슬러올라가 눈부시게 몸을 맡기는 것을 보게 된다. 감
정이 형체를 얻는 순간은 하나의 사건.
2020년 7월
---「곽은영, 관목들」중에서
집이 비어 있으니 며칠 지내다 가세요
바다는 왼쪽 방향이고
슬픔은 집 뒤편에 있습니다
더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나는 그 집에 잠시 머물 다음 사람일 뿐이니
당신은, 그 집에 살다 가세요
2020년 9월
---「이병률,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중에서
목욕 끝낸 아이의 복사뼈와 뒤꿈치에 로션을 발라준다. 아이도 이제 익숙한지 까치발 하고 기다린다. 나 죽고 나서 언젠가, 다 늙어서도 매끌매끌한 저 발을 누군가 알아봐주면 좋겠다.
2023년 5월
---「김상혁,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중에서
영혼은 어디 있을까?
너의 배꼽
그치, 우린 질문으로 시작해야지
2023년 6월
---「백은선,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