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이 뭐예요?”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마애불이라는 단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 뜻을 말해 주면 “왜 하필 마애불이냐?”고 반드시 되묻는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 중에서 범위가 좁고 잘 알려지지 않은 마애불을 선정한 이유를 궁금해했다.
오래전 생각보다 힘든 산길을 올라가 길 끝에서 만난 마애불이 있었다. 마애불은 바위에 서툰 솜씨로 새겨진 데다 얼굴도 못생겼다. 하지만 햇빛 속 마애불의 밝은 미소를 보는 순간 그동안의 고단함은 사라지고 왠지 모를 편안함이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렇게 마애불과의 교감이 인연이 되어 나의 마애불 답사 여행은 시작되었다. 나의 여행에는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독특한 아름다움에 쉼, 치유, 희망 찾기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마애불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바위나 암벽에 새겨진 부처나 보살의 모습 등을 말한다. 삼국 시대에 새로 도입된 불교가 기존의 산악숭배 사상, 바위 숭배 사상 등의 토착 신앙과 융화되어 생긴 결과물이 마애불이다.
자연의 암벽이나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은 낮에는 해, 밤에는 달과 별을 조명 삼아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 햇빛 속에서는 선명한 아름다움이 극대화되고 휘영청 밝은 대보름 달빛 아래서는 총총한 별빛과 어우러져 은은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리고 박물관의 냉난방 시설 등 인위적인 보호와는 달리 마애불은 꿋꿋이 바람과 눈, 비를 맞는다. 옆에서 벗이 되어 주는 나뭇잎의 속삭임, 지나가는 새들, 계절마다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과 어울리면서 계절의 변화도 함께 한다.
자연 친화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마애불 뒤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마애불이 가지는 또 다른 가치이자 의미이다. 이야기는 마애불과 함께 새겨진 명문, 마애불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기록이나 전설 등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또 마애불을 조사 분석한 최근의 연구들은 이야기에 사실적인 날개를 달아주고 여행 중 에피소드나 경험은 이야기를 더 현장감 있게 해 준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마애불은 오래전 여러 계층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서민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왕, 장군, 관리 등 리더의 철학과 고뇌도 느낄 수 있다.
제1장은 따뜻한 미소로 서민의 고된 삶을 어루만져 주었을 생활 속 마애불 이야기이다. 마애불에서는 옛사람들이 느꼈을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을 찾을 수 있다. 생활 방식은 달랐지만 삶을 바라보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마애불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사람, 돌아가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효자, 자식이 없어 애절한 아낙, 나룻배를 젓고 다니는 뱃사공, 호국 의지를 불태우거나 심한 가뭄 때 비를 기원하는 사람, 좀 더 나은 미래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제2장은 마애불 뒤에 숨은 역사 이야기이다. 시대적 배경은 다양하다. 마애불이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 시대, 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뿐만 아니라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대의 치열했던 통일 전쟁 상황이 반영된 마애불, 고려가 황제국임을 보여주는 마애불, 고려 말 왜구 침입의 역사와 함께 하는 마애불, 어린 조카의 왕위 찬탈을 당당하게 드러낸 조선 초의 마애불, 서구 열강에게 둘러싸였지만 힘차게 출발하는 대한제국의 모습이 반영된 마애불 등이 있다.
제3장 인생 속 마애불에서는 마애불을 통해 생각해 보는 인생 이야기이다. 책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기본 바탕은 ‘희망’이다. 희망은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그리스 연합군의 율리시스 왕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던지는 온갖 시련을 견디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 오디세이의 원천이었다. 우리는 굴곡 많은 인생의 길 위에서 뜻을 이루기 위해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포용, 화합 등도 책에 담았다. 마애불에는 서민의 삶의 애환,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 자와 패망한 자, 강력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아버지 황제와 나약했던 아들 황제, 왕권을 찬탈한 자와 이를 비난했던 자 등 대비되는 두 세력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인생에서 별이 된다는 것, 인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큰 바위 얼굴의 의미, 희망의 속삭임 등의 글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마애불이 주는 교훈이다.
마애불은 전국에 200여 개가 있다. 책에서는 이야기 유형별로 모두 23개의 마애불을 골라 소개했다. 원고는 2015년 3월부터 10월까지 ‘조선닷컴’에 연재했던 기사를 골라서 수정·보완하고 새로 추가해 완성했다. 23개의 마애불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마애불이 ‘보충 내용’ 안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부록에는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국의 마애불을 지역별로 요약하여 정리해 두었다.
몇 년 전,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정리한 버킷 리스트Bucket list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마애불 답사 및 기록 정리는 훨씬 이전부터 해왔던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다른 조그만 리스트에 비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든 프로젝트였다. 그래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어서 많은 보람을 느낀다.
이 책은 학문적 논쟁보다는 직접 발로 뛴 경험과 기존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마애불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도 마애불의 한국적 아름다움과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서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마애불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지만, 책 출간을 통해 마애불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10년 이상의 적지 않은 시간 속에 직접 발로 뛰면서 쌓아온 자료들이 책으로 출간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지원해 준 친구와 선후배,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글이 출판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달아실출판사 윤미소 대표님과 박제영 편집장께도 감사드린다.
2019년 9월
최복일
---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