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는 좀 특별한 책이다. 사사기를 열면 신앙의 위인들을 모아놓은 “명예의 전당” 에 오를만한 개성 넘치는 인물군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전개된다.
-명문의 딸 악사를 신부로 얻은 옷니엘
-모압 왕 에글론(젊은 황소)을 도살한 사우스포어 에훗
-꿀 나무(종려나무) 아래 앉아 꿀을 나누어 주었던 꿀벌인 드보라
-방망이로 관자놀이에 나무 말뚝을 박아 살해한 산염소 야엘
-적장 시스라의 목을 여인의 손에 넘겨야 했던 “번개 장군” 바락
-3백 명의 용사로 13만 5천의 미디안 대군을 격파한 전설적 영웅 기드온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를 맞아 비명횡사한 적사사 (anti-judge) 아비멜렉
-황금의 입을 가졌으나... 외동딸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사사 입다
-일그러진 우리의 영웅 “작은 태양” 삼손
제 1 장 사사기를 왜 읽어야 하는가?
1 도대체 이스라엘이 어떻단 말인가?
내가 아는 친구의 아버님은 교회에 갔다오면 가끔 이렇게 푸념하시곤 했다 한다. “교회가면 목사들이 늘 이스라엘이 어떻고 저떻고 그러는데, 도대체 이스라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거야?” 실제로 우리가 살펴볼 사사기는 남의 나라의 이야기, 그것도 지금부터 최소한 3,000 년전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이다.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먼저 가나안 정복의 연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연대에 대한 학설은 두 가지이다. 전기설은 주전 1406-1399년으로 보는 반면에, 후기설은 1250-1200 년으로 본다. 한편 하한선으로는 사무엘의 등장 연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울이 등극하는 해는 1051 년으로 보거나 1020 년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사사 시대는 1360-1050 년으로 보거나, 1200-1020 년으로 보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분의 이야기대로 정말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우리와 별 관련이 없는 케케묵은 남의 옛 이야기는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사기를 읽고, 사사기를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친구 아버님의 투덜댐의 이유는 설교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우리와의 상관성을 곡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데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사사기의 이야기는 주로 신약의 본문을 설교하다가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교훈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예화” (illustration) 로 등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삼손 이야기는 이방 여인과의 결혼 문제를 언급할 때, 입다 이야기는 잘못된 서원의 문제를 다룰 때, 기드온의 양털 뭉치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방법과 연관해서 그저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예가 많았다. 이렇게 사사기의 스토리가 특정한 교훈을 드러내는 도덕적 예화로 주로 등장하다 보니, 사사기의 전체 스토리는 우리와는 상관이 별로 없는 남의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은 것이다.
2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물론 언뜻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는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남의 역사로만 들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사사기는 3,000 년 이전의 이스라엘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남의 옛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에 쓰여질 때부터 그 당시의 선민들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 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기는 언뜻 보면 과거 이스라엘의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양한 수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구약 역사를 각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 피부색과 민족의 경계를 초월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 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재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왜 하필이면 역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과거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역사 이야기는 자기 정체성 확립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 상실증”(amnesia)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한다. 기억 상실증 환자는 의식이나 지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상실하는 병이다. 의식과 지능이 있음에도 기억을 상실함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케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거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때 정체성은 상실되기 마련이다.
사실상 한 사람이나 민족의 과거의 이야기는 그 사람과 그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우리만의 독특한 스토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정체를 의미한다. “나” 라는 정체성은 나의 체험, 다른 이들과의 관계, 나의 선택, 나의 행동,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반응을 포함해서 나의 과거의 역사와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런 과거의 역사에 의해 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각 민족은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이야기들을 통해 각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이야기들을 자녀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전함으로 그들이 그 이야기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야기들에서 자신의 정체성, 혹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도록 한다. 더욱이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본질(essential being)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마치 화학 실험실에서 분석을 거쳐 그 성분을 알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절대적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의 역사적 체험 가운데서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구약에게 기록된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와서 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신 것과, 우리가 그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살도록 우리에게 구약을 주신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함께 사사기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