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이 차기 집행위원장이 될 사람을 집으로 찾아왔고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 그와 정영모는 인사를 나누었고 둘이 모두 같은 상업학교 출신임을 알았다. 그리고 서로 상대가 뜻이 바른 사람임을, 함께 어울릴만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정영모는 그에게 청년동맹 가입을 권유했고 그가 그 권유에 따름으로써 그는 정영모와 일생의 인연을 맺게 되고 또 가시밭길로 들어서게 된다.
--- p.28
신문에서 김기추라는 이름을 찾았을 때 그는 범죄자로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1931년 8월 22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부산 목도소동 사건으로 검거된 김상곤 외 5명은 그간 검사국에서 취조를 마치고 지난 20일 오전 11시 부산 지방법원 제2법정에서 민(閔) 재판장, 원교(元橋) 검사 입회 아래 다음과 같이 구형이 있었다 하며 판결 언도는 27일이라 한다.·김기추 1년 6개월 ·김상곤 1년 ·박종태 8개월 ·안봉찬 8개월 ·허성원 8개월 ·김해룡 벌금 30원『동아일보』는 27일의 재판 결과를 30일자로 보도했다.김기추는 1년 형을, 김상곤은 10개월 형을 받았다.
--- p.34~35
그때 ‘관세음보살’이란 이름을 어찌 내가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전에 징역을 살 때, 관세음보살을 알긴 알았어요. 그걸 벽에 쓰기 시작했어요. 한 오륙 개월, 육칠 개월을 쓰니까 벽 전체가 전부 그 거라. 그때 낙서, 낙서라 했는데, 벽에다 뭘 쓰면 혼난다는 것도 잘 알았어요.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까딱없어. 겁을 내면서도.
--- p.49
한쪽에는 내 아는 사람이 반쯤 죽어서 들어오지, 한쪽에는 모가지가 떨어지는 판이니 내 딴에는 좀 놀랬던 모양이라. 놀래고 걱정하고 뭐 이랬던 모양이요. 그러니까 온 벽에 전부 ‘관세음보살’이죠. 겁난 줄도 몰랐어요. ‘낙서하다 들통 나면 이놈들한테 내가 죽지.’ 그런 생각은 있었지만 그 생각이 그렇게 깊지를 못했어요. 참 이상합니다.
--- p.50~51
큰아버지, 내가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감옥에 면회 갔을 때예요. 언니하고 큰엄마하고 걸어서 갔어요. 대신동까지. 여러 번. 큰 아버지가 나오는데 머리에 두건을 씌워서 데리고 나와요. 정치범들은 모자를 씌워요. 이렇게 삼각형으로, 짚으로 만들었어요. 마당에 앉아 가지고 싸간 음식을 먹었어요. 큰아버지가 산 게 기적이에요.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바로 앞 사람까지 사형을 당했는데 8·15 해방이 되는 바람에 살았지요.- 김길례, 2015.3.8, 산청
--- p.57
드디어 그는 1958년 5월, 4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 영도의 선거구가 2개로 분할되어 기회였다. 그는 자유당에 공천을 신청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손우동孫宇東의 손을 들어 주었다. 김기추는 포기하지 않고 무소속 후보로 등록했다. 후보 등록신청서에 적힌 그의 직업은 무직이다. 소금공장은 처의 소유로 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만우도 같은 지역구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했다.이만우가 당선됐다. 김기추는 낙마했지만 정당 공천이 아닌 무소속 후보로는 대단한 선전이었다. 6,983표를 얻어 6명의 후보 중 2등이었다. 당선된 이만우의 9,608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만우에게는 민주당의 후광이 있었다. 자유당 공천을 받은 손우동은 겨우 1,295표를 얻었다.
--- p.71~72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투표가 있었다. 이 투표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국민들은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짓고 저항했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망명했고 자유당 정권은 글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시위대가 집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양추는 형을 자신의 차에 태워 동래 온천장으로 피신시켰다가 며칠 후 조카딸과 함께 서울로 보냈다. 그렇게 그는 다시 부산을 떠났다. 경희대학교 앞에 동생이 운영하는 꽃소금 공장이 있었다. 그와 그의 딸은 공장에 붙어있는 집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 p.74~75
이분이 ‘상승도리의 설법을 듣고 나면, 또 이런 분을 만나면 삼도지옥을 면한다’고 해요. 이 말에 내가 어찌나 놀랐던지! 나하고 친한 사람이거든. 견성했다 이거라요. 그땐 견성이란 것도 잘 몰랐어요.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지금 살아있어요. ‘삼도지옥에 떨어질 내가 이 양반을 만나 삼도지옥에 안 떨어진다면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느냐?’ 그분을 내가 부처님처럼 모셨습니다! 지금 영종도에 살아 있어요.
--- p.79
그때 종소리가 울려 왔어요. 문득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는고? 예배당에서 오는 줄 알지. 글을 지으려니 어디서 오노 그러지. 그러나 예배당이 예배당이 아니거든. 예배당만이 아니거든. 유정 무정이 본래의 그 지혜로부터 나왔는데, 그래서 유정무정으로 갈렸는데 유정무정의 당처는 하나예요. 쓰는 데 있어서는 유정과 무정이 영 달라. 돌멩이하고 사람이 영 다르지 않아요? 영 다르지만 그 출처는 하나라.
그러니까 종소리 나는 곳도 한 군데 아니겠어요? 우리가 분별해서 예배당 종이다 뭐다 분별하니 그렇지. 그 당처는 하나다. 바로 나한테서 오는 것과 한 가지라. 바로 온 누리가. 그때(까지)는 내 몰랐거든. 바로 내라. 바로 내라. 나를 여의어서 누리가 있을 수가 없어. 허공이 있을 수가 없어. 나를 여의어서. 내가 없다면. 내가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벌어지는구나. 그때 그 생각이 들었지. 만약 삼라만상이 나한테서, 이 종소리도 나한테서 온다는 이 사실을 모른다면 종소리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여? 부처님하고 나하고 일신이라. 그 당처는 하나라. 나눠서 둘이지.
내가 이 도리를 모른다면 부처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여? 부처님하고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면 내가 불교공부를 해도 공부 되는 것 아니라 말이여. 원래 부처님하고 나하고 그 뿌리가 하나라. 이 도리를 알면 부처님하고 나하고 하나라. 이런 식의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가. 연속도 아니고 번개 같아요. 그러니까 절을 하는 것도 몰랐지.
--- p.97~98
대원경이 백봉을 만났을 때는 초로의 나이였다. 그러나 여전히 예뻤다고, 장년의 품격 있는 미모였다고 그 무렵 그녀를 만난 몇몇 사람 들이 필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다생의 수행을 통해 많은 것을 갖춘 여인이었다. 품격있는 미모는 그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지혜로웠고 삿됨이 없었으며 여장부였다. 백봉의 첩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언제나 당당했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백봉과 대원경은 가끔 격렬하게 다투었다. 그렇게 다투고 대원경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백봉은 편지를 보냈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가서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백봉도 그녀를 위해 주었다. 그녀는 백봉와 함께 지내며 품위 있는 이미지와 언행으로 백봉의 품격을 높여 주었고 그가 법을 펴는 것을 도왔다. 참으로 깊은 인연이었다.
--- p.141~142
그렇다면 강론을 쓰기 시작한 것은 빠르게 보아도 늦은 봄이다. 늦게 본다면 그해 금곡에서의 여름 정진법회를 마치고 도농에 자리를 잡은 8월 말이다. 그런데 이듬해 10월 말에 무려 585쪽이나 되는 책이 나왔다. 『대한불교』는 “탈고된 원고가 불빛을 보지 못했다가 제자들의 원력과 홍법원의 협조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고 적었으니 도대체 원고는 언제 끝난 것일까? 청룡사에서의 여름 정진법회시작(7.1)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략 일 년 내외의 기간에 원고를 끝낸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전율했다.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경학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585쪽의 경전 해설서를 쓸 수 있었을까? 그 난해한 유마경을 말이다.
--- p.177~178
필자의 눈에도 그의 무식함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예를 들어 「불도품」에서 “보살이 비도를 행할 때 불도를 통달한다.”는 경문에 대해 통윤은 “美惡齊觀 履逆常順 和光塵勞 愈晦愈明”이란 승조의 글을 인용했다. 얼마나 어려운 글인가? 당연히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 그의 번역을 보며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신론》을 공부하지 않았으니 ‘발업무명發業無明’을, 화엄경을 공부하지 않았으니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그렇다면 그의 번역은 엉터리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일지가 번역한 책을 보면서 필자는 경經을 번역하는 것이, 조사의 글을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했다. 감히 말하자면 백봉의 글이 일지의 글보다 한결 낫다.
백봉은 통윤의 직소에서 출발하였으나 통윤의 직소를 크게 뛰어넘었다. 천리마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으며 모란에 향기를 더해 주었다. 조계종단의 지도자들이 통윤의 직소를 기저로 하여 쓴 책임을 알면서도 광고에 나온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의 무식함으로 인한 서투른 번역, 많은 문법상의 오류, 그리고 고어체의 섞임으로 인한 어려움 등 아쉬움이 많지만 그의 강론은 지금도 유마경을 공부하기 위한 최고의 책이라고 믿는다.
--- p.184~185
어느 날 청담이 대의와 함께 백봉을 찾아왔다. 청담은 당시 조계종 장로원 원장이었다. 이듬해인 1971년 7월에는 월산에 이어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명실상부한 조계종 종단의 실권자였다. 그런 무거운 위치에 있었지만 반년 전에는 백봉이 쓴 《유마경 강론》의 신문 광고에 등장하여 세상에 백봉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제는 출가를 권하기 위해 백봉을 찾아온 것이다.
--- p.205
『대한불교』 7월 9일자 1면에 부산 지국이 낸 ‘불교강연회 안내’ 광고가 실렸다. 부산지국 주최로 백봉 거사를 모시고 7월 12일부터 현대예식장과 영도도서관에서 15일간 법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한 쪽에 실린 광고지만 1면의 광고는 눈길을 끌만했다.반민주정치인으로 몰래 부산을 떠나야 했던 김기추는 이렇게 그의 법회광고가 신문에 실리는 백봉 거사가 되어 돌아왔다. 마가다국왕의 대접을 받는 위대한 붓다가 되어 가비라성을 방문하는 싯달타처럼 그는 태산괄목래의 기세로 고향에 돌아왔다.
--- p.228
《절대성과 상대성》이 발행된 후 백봉은 이 책을 강의교재로 썼다. 1975년, 1976년의 여름 정진법회와 대구법회에서 이를 강의했다. 백봉은 설법의 횟수, 청중의 설법 수용능력을 감안해 강의내용을 기획했는데 《절대성과 상대성》은 초급자를 위한 교재였다.
대체로 평일 법문은 부산에 살며 지속적으로 그의 설법을 들어 온 학인들이 참석했으므로 《유마경》, 《선문염송》 등 난이도가 높은 교재를 채택했다. 주말법회는 청중의 구성이 평일보다 더 다양했으므로 널리 알려진 《금강경》을 가능하면 쉽게 설하려고 노력했고 틈틈이 ‘절대성과 상대성’의 개념, 육신은 자체성이 없음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가 이 육신을 끌고 다님을 가르쳤다.
외부의 초대를 받아 하는 강의는 기초부터 시작했다. 한 번의 설법으로 끝나는 법회도 있지만 대개는 한 주일, 보름 등 이어진 강의가 많았는데 단발의 법회든 이어진 법회든 그는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강의를 구성했고 ‘절대성과 상대성’의 개념에서 시작해 점차 난이도를 높여 나갔다. 여름 겨울의 정진법회는 전국에서 학인들이 모이기 때문에 백봉의 설법을 처음 듣거나, 오랜만에 듣는 학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급과정부터 시작했다. 《절대성과 상대성》은 그렇게 법회를 시작하는 좋은 교재였다.
《절대성과 상대성》 강의를 듣고 이 육신이 무상하며 자성이 없음을 알고, 이 육신을 끌고 다니는 절대의 자리, 즉 허공과 같이 텅 비었으나 슬기가 있는 이 자리를 이해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육신을 끌고 다니는 놈, 그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다. 그래서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전해 주려도 전해 줄 수가 없다.
마치 허공과 같다. 그 빈 자리가 보고, 그 빈 자리가 들으며, 그 빈 자리가 밥을 먹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삶을 굴려라.삶을 굴리되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성성惺惺하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거사불교로서, 생활불교로서 생업을 행하며 깨어있는 것이다. 그 방법을 체계화하고 이름붙인 것이 ‘새말귀’다. 그의 수행방법론은 새말귀로 체계화되었다.
--- p.293~294
백봉은 혜암에 대해서 말을 아낀 듯하다. 혜암은 백봉보다 석 달 먼저 입적했는데 백봉은 그가 입적하기 전 “무상無相 무공無空 무비공無非空” 그러고는 “더 이상 할 말 없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으며 “존경스럽다.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참으로 웅변중의 웅변이다.”라고 칭찬했는데 그것이 필자가 발견한 유일한 평가다. ‘비움과소통’ 출판사에서 발행한 《공겁인》의 황정원 편에 ‘혜암 스님이 견성했느냐?’는 황정원의 질문에 백봉이 ‘견성했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오류였다. 혜암이 아니고 내소사의 해안海眼이었다. 필자의 무지로 혜암으로 적은 것이다.
--- p.324
백봉은 선문염송의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중단하지 않았다. 힘을 다해 원고를 썼다. 1984년 여름을 보내며 그는 지리산에서의 회향을 생각했고 드디어 짐을 내려놓았다. 짬이 날 때, 쓰고 싶을 때 펜을 잡았다. 죽다 살아난 후 그는 시봉을 드는 홍승동에게 말했다.“이제 쓰지 않을 것이다.”15권 중반, 제594화 불자拂子를 마친 후였다.
--- p.355
백봉은 왜 지리산에 가고 싶었던 것일까? 쿠시나가르에 도착해 열반을 보이시려는 붓다께 왜 이곳에서 입멸하고자 하느냐고 아난이 묻듯 백봉에게 물은 사람은 없었을까? 있었다.ㅜ내가 파계사 배도원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선생님에 대해 묻는 거야. 서로 아는 처지거든. 그래서 “지리산에 들어가시려고 한다.” 대답했지. 그랬더니 스님이 성을 내시는 거야. “아니, 산중에 있다가도 시중으로 나와야 될 판인데 지금 산중으로 들어가는 게 무슨 소리냐?” 그래서 선생님께 가서 배도원 스님 말을 전했어. 그랬더니 선생님이 “나는 지리산에서 죽게 되어 있네!” 그리 대답하셨어. 그게 다야.- 황정원, 2015.3.10, 동래
--- p.385
그가 남천동에서 한 선시 강의의 녹음은 11월 18일로 끝이 난다. 설법을 시작하며 백봉은 아침에 짐들이 일부 갔고 매일 조금씩 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가 시작된 것이다. 분위기로 보아 부산의 마지막 설법으로 여겨진다.
여러분, 상승설법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를 만나야 돼요. 사람을 만나야 돼요. 처소를 만나야 돼요. 그 세 가지 인연이 원숙해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 인연중의 인연인 것 같습니다.
내가 부산에 올 때는 ‘태산괄목래(泰山刮目來)’ 하며 왔습니다. 나만 그러냐? 여러분도 이 세상에 올 때는 ‘태산괄목래’로 왔습니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올 때는 ‘태산괄목래’입니다. 허허허. 내가 산청으로 가는 것은 녹수가 엄이거라. 녹수가 귀를 막고 가는 거나 한가집니다. 그래서 살짝 갑니다. 일체 번거롭게 하지 않고. 나만 그러냐? 여러분도 가실 때에는 녹수엄이거라.- 백봉,1984.11.18, 남천동
--- p.401
5월 9일 백봉은 입주 학인을 모아 놓고 그의 선시 「서래의西來意」를 강의하면서 ‘일체를 수용하라’고 말했다. 그 시는 ‘무궁無窮’이란 글로 시작한다.無窮世界又無盡 다함없는 세계라서 또한다함 없는거이用去用來幾多年 쓰며가고 쓰며올새 얼마나한 세월인고買得靑山橫綠水 사서얻은 청산에는 녹수마저 놓였으니帆胎西意自歸矣 조사뜻을 담뿍실은 돛대배가 절로오네.산청선원의 살림은 궁窮했다.
그는 그날 설법에서 부산에서의 삶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풍족했는가를 말하고 산청에서 풍족한 것은 물이라고, 선원 뜰에서 그냥 흘러가는 물이 아까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시의 용거용래用去用來와 청산녹수靑山綠水를 말하며 수용하라고 강조했다.
--- p.413
몇 시간 후 그는 다시 법당에 들어섰다. 법당에는 다과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철야정진의 마지막 날 자정이 넘어 열리는 다과회는 정진 참석자들이 다과를 즐기며, 때로는 막걸리를 마시며 정진의 소감을 나누는 자리였고 그때까지 백봉이 참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아마 누워 잠을 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생의 마지막 밤이 아닌가?‘가서 그들과 함께 하자!’그는 마치 자신의 가슴에 그들의 모습을 새기듯이 참석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을 것이다.
--- p.447~441
이로써 20세기, 지구에서, 백봉 김기추라는 이름의 씀이用는 그 막을 내렸다.‘이번에 지구에 와서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 이제 지구에 다시 오지 않겠다. 우리 도솔천에서 만나자.’입적하던 날 그가 다과회에 참석해서 한 말이다. 이제 그를 만나려면 도솔천에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지구에 있지만 지금도 그와 함께 있다. 그러나 그가 언젠가 다시 이 지구에 육신을 나투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지구에 의지해 삶을 굴리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 p.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