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벽에 어느 독자에게서 온 문자 편지다.
“새벽 2시 55분에 일어나서 『내가 졸고 있을 때』(기일혜 수필집?1)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습니다. 「나의 지병」을 볼 때 저와 ‘동병상련’ 점을 발견했습니다….”
나도 「나의 지병」을 찾아서 읽고, 내친김에 『가난을 만들고 있을 때』(기일혜 수필집 2)를 읽었다. 글 중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애교가 많은 여자」가 내 대표작(수필)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친구에게 이 글에 대해 물으니, 그는 이 글이 좋아서 가끔 읽고, 얼마 전에도 읽었다면서, “이 글에 기일혜의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한다. 나도 내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 여겨져, 이 글 제목을 수필집(43집) 제목으로 하고, 안 읽은 분들을 위해 여기에 다시 싣는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정선 친구가 곤드레 한 박스를 보냈다. 2시간 15분간 삶아서, 거의 다 들고 동생 주려고 지하철 이수역으로 갔다. 동생이 많으면 싫어할까 봐 얼마쯤은 따로 들고. 동생은 많다고, 따로 들고 간 것은 안 가져간다. 그때 쉼터, 우리들 옆에서 우리 얘기를 다 들은 어떤 아주머니가 “그럼 그 곤드레 나한테 팔아요” 하나, 나는 “안 팔아요” 한다.
동생과 더 얘기하는데 그가 또 팔라고, 나는 안 판다 하고.
그 뒤로도 그가 더 졸랐으나 나는 꽉 막힌 사람처럼 안 판다고만. ‘그거 그냥 주면 되는데…’ 동생이 안 가져간 곤드레 그에게 주기 싫은 마음 전혀 없었다. 그에게 얼마든지 기쁘게 거저 줄 수가 있다. 나는 그때, 그와 돈 받고 파는 상거래(商去來) 안 한다는 생각에 갇혀, ‘거저 준다’는 생각 못했다. 나중에 다른 동생에게 곤드레 얘기하면서야 ‘그에게 다 줄 걸.’ 그에게 다 줘 버렸으면 무겁게 들고 오면서 ‘나는 왜 누구에게 적당히 줄 줄을 모를까’ 한탄도, 자책도 않고 무한히 즐거웠을 텐데… 미련이 먼저, 지혜는 나중이다.
--- p.17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 “공간은 그저 비어 있고, 수동적으로 채워지는 곳이 아니다. 공간은 매 순간 인간 상호 작용에 개입하고, 의식을 변화시킨다.”
외국 어느 철학자가 한 말. 전에도 몇 번이나 인용했지만, 생각할수록 충격적인 말. 아무리 들어도 내겐 충격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공간은 그저 비어 있고 수동적으로 채워지는 무생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간은 살아서 매 순간 우리들의 상호 작용에 개입하고, 더 무서운 건 우리들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것. 요즘은 코로나로 집 안 생활이 많아져서, ‘집 안의 공간 생산’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기다.
그리고 내 집의 공간 생산자는 바로 그 가정의 주부인 아내요 어머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내 집 안, ‘공간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관심 가지고 있다.
아내나 어머니의 안목, 마음의 크기만큼 자녀는 물론 남편도 자란다. 아내는 남편의 어머니요, 남편이 쉬는 따뜻한 공간이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 p.21
잠을 3시간 정도 자면서 글 한 편을 썼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글을 읽고 고치고… 아침에 일어나니, 혀 안쪽에 금이 간 듯 침 삼키기가 곤란하다. 쉬려는데 친지 전화다.
“그분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 어떠세요?”
그분은, 친지에게 고마운 일 해 주고 “내게 뭐 해 줄 거야” 해서, 친지가 “기일혜 작가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단다.
글보다 사람이라, 안 좋은 몸이지만 승낙. 기온이 35.4도. 6월 서울 기온으로 62년 만이라고. 한낮 지하철 인덕원역에 내려 ‘오뚜기 식품’ 가는 버스 기다리는데, 51번 버스가 선다. 거긴 안 간다고. 나는 버스 노선도를 확인하고 불볕에 멍하니 오래 서 있는데, 수수한 차림의 여인이 와서 “저 8번 버스는 오뚜기 식품 가요” 속삭이듯 가르쳐 준다. “아니 어떻게… 아까 내가 묻는 걸 어떻게 듣고… 고마워요.” 나는 폭염 속에서 시원하게 살아나서 아가씨도 같고 부인도 같은 그 여인을 뚫어지게 본다. 어느 미인이 이보다 아름다우랴. 친지 만나러 안 가고, 그 여인 따라서 한없이 가고 싶어진다.
--- p.37
백일홍 꽃밭. 한 7평 남짓한 밭에 있는 수많은 백일홍 이파리가 희어지는 병으로 죽어 가고 있다. 나는 그 꽃밭 보기가 괴로워서 그곳으로 잘 안 간다. 어느 날 궁금해서 한번 가 봤다가 신기한 걸 발견한다. 그 많은 백일홍이 다 병들어 폭우에 쓰러져 가는데 유일하게 오직 한 그루, 백일홍 꽃밭 속에 들어 있는 ‘보라색 홑잎 봉숭아’는 건강하다.
가지를 14개나 뻗고 우람하게 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 봉숭아 이파리 수십 개를 보아도 한 잎도 희게 병든 게 없다. 그 보라색 봉숭아가 신기해서 요즘은 매일 아침 가서 들여다본다. 이제는 줄줄이 씨를 맺고 꽃은 가지 끝에 몇 송이 피어 있지만 아직도 이파리 하나 병들지 않고 생생하다.
이 봉숭아를 보면서 생각한다. 옛날에 어른들이 ‘씨도둑은 못한다’고 했다. 백일홍은 이 전염병에 약하고 봉숭아는 이 병에 강하다. 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며칠 뒤 폭우가 더 내려서 백일홍 꽃밭은 초토화되고, 숨어 있던 봉숭아 세 그루가 더 나타난다. 전염병은 백일홍과 봉숭아를 분명하게 구별시킨다. 종말에는 알곡과 쭉정이,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된다. ‘예수 생명이라는 씨’를 가진 자와 안 가진 자로 나누어진다. 예수 생명을 가진 자는 봉숭아가 전염병을 이기듯, 환란도 죽음도 이기고 살아난다. 살아서 씨를 맺는 알곡이 된다. 요즘엔 먼저 맺은 봉숭아 씨가 떨어져서 어린 아기 봉숭아가 파랗게 네 그루나 자라나고, 그중 한 그루에는 두세 송이 꽃도 피고.
하나님은 자연계를 통해서도 계시하신다. 이런 백일홍과 봉숭아를 들어서 직접 가르치신다. 이 땅에서 잠깐 살다가 멸망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인 예수님 믿고 영생 얻으라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p.73~74
오래전 일이다. 어느 인생 후배가 시집가서 시부모와 함께 사는 얘기를 해 준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시아버지는 성경을 100독(?)한 존경받는 분인데 사고방식은 성경적이지 않고 가부장적.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고 한다.
지난날 보면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 무서워서 피했다. 얼굴에 권위가 나타나 있다. 기도 많이 하는 분들은 ‘더 많은 사랑의 얼굴’이어야 하는데, 더 많이 위엄 있게 굳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기도 많이 한 사람은 영권(靈權)이 있다고 한다. 온전한 영권 가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도 인자와 긍휼이 넘치는 사랑이시고.
그런데 왜 사람은 기도 많이 하면, 영권이라는 권위의 옷 입고 무서워지는가.
내가 아는 기도 많이 하는 분이 있다. 누가 기도 부탁하면 기도하다가 밤중에도 새벽에도 교회로 뛰어가는, 기도가 생활인 분이 내게 기도 부탁한다. “작가님, 기도하실 때, 우리 아이들 이름이라도 불러 주세요….”
기도 많이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기도 많이 하는 분이 저렇게 겸손하게 기도 부탁하다니… 무거운 책임이 느껴지나 이 잠언 말씀을 붙잡는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언 29:23).
내게 기도 부탁하는 그 겸손한 어머니는, 자기 자녀 위해서 얼마나 마음 다해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양육할 것인가. 내게 기도 부탁하는 그 어머니의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자녀들을 주 안에서 영예롭게 하시기를!
--- p.107~108
남편은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이 끝나고 집에 오면 친구들에게 전화한다. 어제 낮, 남편은 친구들 만나고, 마트에 들러 부식 사 가지고 와서 씻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어느 친구에게 전화한다.
“너 왜 지금까지 집에 안 들어갔냐? …어디서 해찰했냐?”
옆에서 듣는 내가 막 웃는다. ‘어디서 해찰했냐?’ 한참 웃다가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이 해찰했냐고? 하는 말이 너무 우스워요. 아이구, 귀여워라. 90세 가까운 노인들이 집에 가면서 무슨 애들같이 해찰을 할까?”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몇 정거장(지하철) 더 가는 거야. 친구 만나러 갈 때도 약속 시간보다 이르면 몇 정거장 더 가기도 하고, 내려서 여기저기 서성이기도 하고. 해찰하는 것이지. 우리는 만나면 어릴 때 쓰던 말을 많이 써.”
“그래요. 그렇구나, 재미있네.”
다음에 오빠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도 웃으면서 말한다. “옛날에 집에 가기 싫은 애들이 산 밑에 앉아서 놀다 가지. 집에 가면 소꼴 먹이라고 하고 일을 시키니까.”
가난한 산골에서는 아무리 초등학교 어린애라도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무한정 놀고만 싶은 아이들은 귀가 도중에 실컷 놀다가 간다. 어른들은 애들이 학교 가거나 심부름 갈 때, 꼭 하는 말이 있다.
“해찰하지 말고 곧장 오너라.”
아이들은 산굽이를 몇 개나 돌아서 가는 귀갓길이 심심하다. 길가가 바로 산 밑인데, 야산 밑 풀밭이나 근처 큰 바위 위에서 놀다가 해가 넘어가려고 하면 집으로 간다. 부모님의 꾸중도 이 즐거운 해찰을 막지 못한다. 해찰은 그 가난한 시대 일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쉬는 시간이요, 누구에게도 구속 안 받는 자유로운 시간.
요즘 어린이들은 해찰할 틈도 없이 공부방에, 학원에 가야 한다. 어른들도 해찰할 틈이 없이 분주하다.
사람에게는 ‘건전한 해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 p.113~114
그날, 전날부터 나는 괜히 들뜨고 즐거웠다. 내일 스케줄을 앞두고. 이름하여 ‘화려한 외출’. 내가 이 나이에 누구 만나러 가는데, 이렇게 즐거울까? 나는 다음날 동생 집으로 가서, 같이 동생이 소개한 집 도배하시는 이(李) 사장님 부부를 만나러 간다. 그는 집을 도배할 때, 형광등 안까지 청소해 주고 그 주위까지 말끔히 도배하고 집 안에 손볼 곳이 보이면 조용히 고쳐 놓는다. 조용히 정성 다하시는 모습에 동생은 감복했고, 나도 알게 된 분이다.
도배 현장, 그들의 일터에서 그들 부부를 만난다는 설렘, 화려한 외출 앞두고 전날 밤, 남편에게서 카드도 받아 놓고.
나는 유명한 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유명하다는 것’ 그 자체가 내 마음을 안 끌어간다. 유명함으로 자기도 모르게 유명이라는 투명 옷을 한 꺼풀 입고 있어, 순수하기가 어렵다. 무명의 꽃이 향기로운 것처럼 평범한 사람의 숨은 조용한 미덕이 아름답다.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면서, 도우면서 사는 사람은 존귀하다.
--- p.115
“아주머니같이 세상에서 애교가 많은 여자는 첨 봤어요!”
나는 몽롱한 꿈에서라도 깨어난 듯 눈을 깜박이면서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고 삭막한 고깃간 한구석에 낡은 소파가 있고, 거기에 나이를 알아보기 힘든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신의 어떤 감동에만 빠져, 외계(外界)를 거의 못 느끼고 있던 내게 그 남자는 어디서 홀연히 나타난 듯했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도 내게는 아스라하게 들렸다.
“예…? 내가 애교가 많다구요?”
“예, 그래요. 나 원,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당신처럼 애교가 많은 여자는 아직껏 본 적이 없어요!”
“어머나! …그래요?”
나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내 이 처절한 마음의 표현을 가벼운 애교로나 봐 버리다니… 나는 약간 억울해서 동조라도 구하듯 고깃간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손잡이가 달린 칼로 고기를 잘게 잘게 썰고 있었다.
“아저씨, 힘드실 텐데, 기계로 갈아 버리지 그러세요?”
“고기가 너무 적어서 한 점이라도 기계에 묻으면 안 되니까요.”
나는 또 눈물 어린 목소리로,
“아저씨,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모습을 보니 칼질도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힘이 납니다. 요즘 세상에 원 아주머니 같은 분도 있구나 해서… 돈이 썩어지게 많아서 흥청망청 쓰고도 남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얼마 후 다지듯이 곱게 썰어진 쇠고기를 받아들고 나는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싸늘한 대기를 시원스럽게 마시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 꿈만 같은 마음속으로 또렷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얼마 전 고깃간 구석에 앉았던 남자가 내게 들려주던 말이다. ‘…당신처럼 애교가 많은 여자는 아직껏 본 적이 없어요! ….’
그때는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던 말들이 점점 분명해져 갔다. 그래, 어쩌면 그 남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애교가 많은 여자?― 내게 있어서 애교란 하나의 가벼운 몸짓이나 눈짓이 아니다. 내 마음을 다해, 내 전부를 다해, 그 순간 상대방에게 드리는 눈물 어린 내 진실인 것이다.
나는 깊고 조용한 밤하늘을 향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의 제 애교를 보셨나요? …나는 내내 미소를 흘리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라도 보낼 것 같은 무한량한 미소를, 눈물 어린 미소를 머금고 가고 있었다.
--- p.172~174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할머니 독자가 나를 찾아왔다. 머리가 온통 하얀 할머니는 봉투 하나를 내게 준다. “…우리 임대 아파트는 몇 년에 한 번 정부에 임대료를 내는데, 그걸 내려면 몇 년을 모아야 해요. 이번에는 코로나로 깎아 줘서, 돈이 생겼어요…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세요. 백만 원이어요.” “이렇게 큰돈을! … 요즘 내가 울먹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에게 드릴게요.” …임대 아파트에서 홀로 어렵게 사시는 할머니는 ‘그날, 백만 원어치 가난을 만들었다.’ 할머니의 가난은 이웃의 가난을 돌보게 하는 깊은 아름다움이다.
“기도는 인간성의 자라남.”
가난한 할머니가 만든 ‘그날, 백만 원어치 가난’은 그의 기도요, 그의 인간성의 자라남이다.
내가 만드는 가난도 내 기도요, 내 인간성의 자라남이다.
---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