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없는 지구는 그저 암흑의 얼음 덩어리일 뿐이다. 그런 태양이 달과 별의 아름다운 존재를 위해 물러선다는 것이다. 해가 져야 세상이 밝아진다는 이 시의 역설은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역설로 이어진다.
해가 져 줘야 우리가 쉴 수 있는 밤을 맞이할 수 있다. 지구를 위해 기꺼이 매일 져 주는 해처럼 반드시 져야만 승리하는 신비한 역설이다.
“No cross, no crown”(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이 말은 “No sweat, no sweet”(땀이 없으면, 달콤함도 없다)이나 “No pain, no gain”(수고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대가(代價) 없이 된 대가(大家) 없다”는 식의 말들을 파생시켰다. 그러나 원 속담은 이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십자가 고난으로 얻은 영광의 면류관은 왕의 금관이 아닌 ‘가시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곳으로부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약 800미터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가시관을 쓰고 채찍질을 당하며 걸어 올라가야 하는 저주의 길이었다. 군중들이 침을 뱉고 야유하는,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무거운 나무 형틀을 직접 짊어지고 올라가야 하는 가시밭길이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 끝,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섰다. 십자가를 져야만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이 역설의 현장. 오로지 가시로 가득한 길을 통과해야만 꽃길에 도달할 수 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길이었지만, 그 길이 꽃길임을 아셨기에 그분은 묵묵히 걸어가셨다.
--- p.24-26
처음엔 대학가에서 회자되다가 지금은 청소년들이 주로 쓰게 된 유행어가 있다. ‘인싸’와 ‘아싸’라는 신조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친화력이 좋아 모임 안에 잘 흡수되는 사람을 인싸(insider)라고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밖으로 맴도는 사람을 아싸(outsider)라고 한다.
왕따와 그 양상과 동기가 다른 아싸는 동료에게 배척을 당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아니라 자발적 단독형 인간이다. 불투명한 미래와 팍팍한 현실 속에서 가성비를 최우선시한 시대의 총아(寵兒)랄까?
그렇다면 세상과 공존하고 있는 교회는 인싸인가, 아싸인가? 세상 안에서 긴밀한 관계 맺음을 시도하는 적극적인 오지라퍼인가? 아니면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전사인가? 거룩한 예배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아싸의 고민과 역동적인 선교 공동체를 구축해야 하는 인싸의 사명이 교차하는 이 시점에서 교회가 잡아야 할 최선의 캐릭터는 무엇일까?
지금은 예배도 영상으로 대체된 ‘온라인 시대’이자, 헌금하기를 꺼려하는 ‘불신의 시대’이다. 또한 헌신하지 않는 ‘워라밸 시대’이며, 자신의 가치가 중요한 ‘업글인간 시대’이다.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 변화에 따라 살지만 교회가 꿈꿔야 할 궁극적인 비전은 복음으로 살아 내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임이 분명하다.
--- p.77-79
미국의 긴급 전화번호 911처럼 전도서 9장 11절은 숨넘어가는 인류에게 긴급 심폐소생술을 해 주는 듯하다. 재물, 건강, 성공, 명예, 건강, 소소한 행복을 위해 매일같이 앞만 보고 경주해 온 인류를 ‘휴먼레이스’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터. ‘남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 ‘실력을 키워서 승리를 쟁취하자’, ‘체력은 국력이고 힘이 곧 선이다’, ‘꿈과 희망을 키우는 행복한 미래’ 등 저마다 성공과 행복을 향한 열망을 발산하는 현대 인류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전도자의 응급 처치는 다소 생소하다.
전도서의 저자가 누구던가.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다윗, 금수저 일곱 개를 물고 태어난 성공의 아이콘, 솔로몬이 아니던가. 그는 최고의 지혜자요 최대의 강한 자이며 최다의 부요자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내린 인생의 결론이 ‘해 아래에서 배태된 온 인류의 몸부림은 의미 없다’였다니. 그의 뿌리 깊은 비관주의는 전도서 열두 장 전체를 통틀어 ‘의미 없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벨’을 무려 서른여덟 번이나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한 냉소적이고도 허무주의적인 문제 접근 방식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배설물 그 자체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확했다.
사람이라면 응당 잘 먹고, 잘살고, 하는 일마다 잘되기를 바란다. 이런 인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전 3:13). 그러나 인생의 종착역, 인생의 절대 절망인 죽음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911로 돌아가자. 전도자는 9장 11절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오직 그들 모두에게 때와 기회가 있다고 말이다. 허무와 절망의 끝자락에 실낱같은 희망이 하나 걸려 있다. 내가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 허락된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 p.172-174
‘죽음, 역병, 전염병’이란 뜻의 히브리어 ‘데베르’는 ‘말하다’라는 뜻의 ‘다바르’에서 유래된, 뿌리가 같은 한 단어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의 왕관을 쓰고 앉아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데베르’를 통해 ‘다바르’해 주신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다바르를 우리 인생의 어디에 놓기를 원하실까? 성경 66권 중에서 정중앙에 위치한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을 담고 있다. 무려 176절에 달한다. 히브리어 알파벳 스물두 개를 가지고 열덟 절씩 배열한 이 편은 온통 다바르에 관한 내용이다.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 말씀, 길, 강령 등 다양한 다바르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무력함이 드러난 한계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은 빛을 본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