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을 각각 율법과 은혜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명백히 편향적 성경읽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있습니다. 구약에 율법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지만 그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을 향하여 주어진 것이지, 그 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점에서 신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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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처음으로 선포되는 장소입니다. 그 뜻하심이 인간의 죄로 인해 막혀버린 상황이 구약의 본질적인 선언일 것입니다. 이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고, 죄로 인해 막힌 담을 십자가로 일시에 제거해버리셨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신약은 이제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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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였다면, 신약의 새 계명은 사랑의 기준이 다릅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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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세상을 이루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죄가 인간 삶에 끼어들기 전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런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기나긴 기다림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어 놓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셨던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대속의 위력이며 효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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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는 인류를 한 사람으로 시작케 하신 한몸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인류 전체가 한몸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그 관계성이 원죄의 기원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결국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려고 관계를 끊는 것과 동료 인간을 향한 한몸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그 어느 것도 아닌 관계의 단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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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성의 파괴라는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원죄가 없다고 봅니다. 만약 원죄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또한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산 것에 대한 영원한 보상을 줄 승리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죄로부터 멀어지고, 죄를 상쇄할 율법이 주어져 있고, 그 율법으로 충분히 새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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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이냐, 자유의지론이냐의 논쟁에서 어느 쪽이 이길 것이냐는 어느 쪽을 지지하는 구절들만 모아서 주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또 다른 선택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끝도 없는 전쟁이며, 영원한 평행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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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시계의 추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듯이 시대의 상황과 사상적인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진리는 아닐 것입니다. 진리는 어느 시대, 어떤 상황, 어떤 사조 속에서도 동일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면밀히 살펴보고 거기에서 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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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어떤 사람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의미를 내포한 주장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한 구절이 문맥을 벗어날 때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은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만들고, 사람이 만들어낸 주장이 아닌,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예정론과 자유의지론도 필요한 구절을 선별해서 사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성경의 문맥 속에서 그 진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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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땅을 선물로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는 것이 마침내는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인해 탄생될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소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선택하는 것은 그 외의 모든 민족들을 유기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탄생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렇게 잠시 소외된 민족들을 하나님의 품 안으로 불러들이시려는 큰 계획의 일환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선택하심으로 제외된 이스마엘과 야곱을 택하심으로 제외된 에서까지도 결코 유기된 존재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백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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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님의 그 절대주권적인 구원역사에 수동적으로 감사의 응답인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예정론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인 구원이 인간의 행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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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나님께서 예정론에 대한 교리를 확고하게 세우시기를 원하셨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예정을 보여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느 순간 기록이 닫혔습니다. 성경이 닫힌 이유는 이제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삶의 길을 바르게 깨달아 선택하며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셨기에 가
능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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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결론은 참으로 공포스럽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시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그것이 곧 영벌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살아온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갈림길이 작은 자에게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갈라진다는 점에서 혼선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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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죄 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꺼이 은혜에 응답하는 삶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다음에는 분명한 삶의 길이 제시됩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보여준 구원받은 자의 길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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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삶의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 법을 지켜나갈 때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평생토록 지키며,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은 구원받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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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신약은 결코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다”라고 말하는데 그 정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도 은혜로부터 출발하고, 신약도 은혜로부터 출발합니다. 구약을 읽다보면 율법이 강조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본질은 율법이 결코 앞서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값없는 은혜의 구원이 앞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율법을 행하는 삶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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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없이 산다는 자체가 은혜의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거나, 혹은 그 놀라운 큰 구원을 무시하는 처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값없이 그 놀라운 은혜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레 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행함이 구원받은 존재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토로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의 구원과 감사의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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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영혼은 심판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천국과 영생이라는 사후세계 또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매일의 삶을 은혜로 살아가며 주님과 사랑의 동행을 이룰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바울이 선언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롬 3:21-31)과
야고보가 전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는 말씀이 삶 속에서 충돌이 아닌,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제자의 길을 걸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안타깝게 무리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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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주지해야 할 부분은 여기에서 다루는 ‘무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길에 관심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안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무리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것이야 당연지사이기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제대로된 정체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때로 제자도가 어떤 길인지 몰라서 무리의 길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교회에 출석만 하면 되는 것인 줄 알고 무리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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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를 다룸에 있어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기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제대로된 방향을 향하여 전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통해 이루기를 소망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시작점인 태초의 천지창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신 소명 속에 이미 나아가야 할 길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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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인물 앞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두 번의 기회를 소진해 버린 인류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과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시작하여 동일한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데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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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시작과 끝의 일치를 간절히 소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브라함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명령의 특징을 살펴보면 어디가 시작이며,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시작과 끝 두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어떤 공통점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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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작과 끝에 ‘가라’는 명령을 내리시는데 히브리어 원어로 ‘레크-레카’로 해석하면 ‘너를 위하여 가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가라’라는 명령형은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만 등장하며,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도 이렇게 작과 끝에만 단 두 번 등장하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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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께로 모든 것을 옮겨 놓는 신앙의 여정이며, 이것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면 믿음의 조상의 길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믿음의 여정이 어떠한 길인가를 제시하는 본이 될 것입니다. 이 양 끝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그리고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는 형태를 통해 순종을 묻고 있다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구체화되어 ‘삶의 법’출 20-23장; 신 12-26장으로 주어지며 순종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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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시작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과거이며, 근본이며 나무로 치자면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제자도에서는 이 아버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그물과 배와 함께 언급됩니다. 이는 곧 어부로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도구이며, 삶을 위해 의지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결국 시작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와 동일한 의존의 도구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존과 생명의 근본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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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긍정적인 순종과 승리의 역사보다는 안타깝게 실패한 불순종의 역사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제자보다는 무리가 월등히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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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지은 자에 대한 구원의 회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전폭적인 주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징계의 시간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긍휼하신 용서를 기대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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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하나님의 뜻을 시작부터 끝까지 이루는 성취의 삶을 살아가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길을 열어 간다면, 무리는 도중에 하차하여 미완성의 삶을 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에서 무리로의 퇴보는 최선을 다해 없애고, 무리에서 제자로의 전향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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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시작과 무리의 시작은 동일한 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면’,무리들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마 4:22이라면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는 기적을 따르는 것’마 4:25이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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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시며 말씀을 전하실 때에는 분명 무리 또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이 계속되며 예수님의 기적은 줄어가고, 그리고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무리들의 이탈이 가속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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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좋아하는 무리는 다수이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제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리는 자기 마음과 감정이 기준이지만, 제자는 스승과 그의 뜻이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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