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답을 지우고 다시 쓰듯, 아이도 ‘지울 수’ 있었다. 딸은 안 쓰느니만 못한 답이었다. 1990년은 60년마다 돌아오는 백마의 해였고, 백말띠 여자아이는 기가 세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 p.2 「제0장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에서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할 것이다. 평균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극단의 피해 사례도 아닌 내 삶으로서밖에는, 내가 그 중력을 밝혀낼 방법이 없다.”
--- p.18 「제1장 첫 번째 단서」 중에서
“점점 내 차례가 가까워진다. 내 가슴 속에도 돌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들어차고 있다. 그건 성교육 시간 보건 선생님의 조심스러운 표현대로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게 아니다. 멍울 같은 가벼운 말로는 다 담아내지 못한다. 차라리 나를 어디 멀리 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짓누르는 누름돌, 토해낼 수 없는 좌절이 똘똘 뭉친 암석 덩어리, 이 여자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은.”
-- p.55~56 「제3장 서로를 부르는 영혼」 중에서
“출발선에 선 우리 앞에 장애물은 없다.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것이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을 한 모양이지만, 알 바는 아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니 고마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달리기만 하면 된다. 게임의 규칙은 이론상 공평하고 우리는 작은 반칙 따위는 거슬리지도 않을 만큼 명백히 우수하다.”
--- p.73~74 「제4장 알파걸의 베타 엔딩」 중에서
“결혼 4년 차에 가까워지는 나는 이제 남자를 다르게, 더 정확하게, 환상을 상당히 걷어내고 본다. 쨍하게 도수가 맞는 페미니즘이라는 안경을 쓴 나에게 모든 것은 한결 또렷하게 보인다.”
--- p.225 「제8장 안개 너머의 목소리」 중에서
“이렇게는 살기 싫어. 그건 아주 오래 걸린 내 답이다. 나는 다른 삶은 모른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삶, 유일한 이야기, 남자가 주는 익숙한 고통과 모욕은 이제 둔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안개 너머 남자 없이 사는 삶은 거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래도, 많은 걸 잃더라도, 저 너머에 아무도 날 받아줄 사람이 없더라도, 내 대답은 같다.”
--- p.254 「제8장 안개 너머의 목소리」 중에서
“걸어 다니는 피해 현장이 되고 나서야 법은 우리를 피해자로 인정한다. 그래도 나만은, 내가 벌써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있다. 더 깊이 들어가 삶으로써, 혹은 죽음으로써 입증하지 않아도, 나 자신이 이미 증거라고 직감하고 있다.”
--- p.270 「제9장 서울역의 여자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