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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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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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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96쪽 | 588g | 135*195*34mm
ISBN13 9788965781783
ISBN10 896578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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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금장치를 비틀어 숫자를 하나씩 맞췄다. 분명 어찌 내가 그 번호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 아홉, 넷, 둘. 1942.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그 숫자. 자물쇠는 뻑뻑했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다. 70년이 지났으니까.
내 눈길을 처음 사로잡은 것은 로켓(사진 등을 넣어 목걸이에 다는 작은 장신구 -옮긴이)이었다. 작은 타원형 로켓의 변색한 은 위에는 곱슬곱슬한 덩굴손 그림과 함께 가운데 V 자가 새겨져 있었다. 목걸이 줄은 아름답고 섬세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줄을 흘려보았고,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걸쇠를 낚아채는 바람에 로켓이 용수철처럼 튕기며 열려버렸다.
--- p.21

갑자기 요란한 끽 소리와 함께 예리하게 찌르는 느낌이 다리에 전해졌다. 나는 그 충격으로 쌍안경을 떨어뜨렸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뱉었다. 내 곁에 펭귄 한 마리가 있었다. 분노에 차서 날개는 빳빳이 세우고, 부리는 그다음 행동을 취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내가 뭔가 조처하기도 전에 녀석은 내 정강이를 몇 번 더 가혹하게 부리로 찍어내더니 마치 집게처럼 내 무릎 아래에 매달려 자기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방수 바지와 긴 내복을 통해 살갗으로 아픔이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 p.162

정말로 그 블로그에는 할머니의 사진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음을 고백한다. 사진 속에서 할머니는 웃고 있었다. 진짜로 웃고 있었다고! 할머니는 천사의 무리나 뭐 그런 것을 보기라도 한 듯 황홀해 보였다. 하지만 천사가 아니잖아. 펭귄이잖아. 엄청난 펭귄 무리가 할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땅딸막한 흑백의 형체로 이뤄진 바다 같았다. 그리고 모자가 달린 폭신폭신한 선홍색 재킷을 입고 크고 번쩍번쩍한 핸드백까지 든 할머니는 눈 위에서 찬란히 빛나는 빨강 그 자체였다. 그에 어울리는 선명한 빨간 립스틱까지. 그러니 할머니의 미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p.178

다시 펭귄을 만나는 일은 멋졌지만, 그 사이에서 작고 동그란 사체를 여럿 발견하는 일은 충격적이었다. 그 광경은 로켓이 걸려 있는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살아남은 펭귄은 공동체를 묘지로 만들어버린 그 요소들을 무시하고 시끌벅적한 행동을 이어나갔다. 상실이 생겨난 모든 자리에 새로운 생명도 피어났다. 군집지 이곳저곳에서 흔들거리는 조그마한 머리들이 알을 깨고 나타났다.
--- p.251

나는 쿵쾅대며 전속력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복도에서 바로 아멜리아 수녀와 마주쳤다.
“엔조는 어디 있어요?” 목이 메 날카롭게 다그치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아멜리아 수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가슴에 걸린 은십자가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나는 미쳐 발광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러자 그녀가 말을 해주었다.
복도 전체로 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 아기.
내 아기.
--- p.338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저들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대하게 물결치는 생명의 무리. 엄마와 아빠와 부부와 아기 들이 이루는 흑백의 왕국.
나는 언덕을 내려가 어둑어둑한 눈보라 속에서 펭귄들 사이를 걸었다. 일부는 나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대부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에 계속 집중하고 있었다. 함께 서로를 보호하고, 함께 부양하고, 함께 떠들며, 함께 자는 펭귄들.
이거구나,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펭귄들의 삶의 목표로구나. 내 삶에는 저 ‘함께’라는 것이 빠져 있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존재는 은제품 속에 간직된 채 줄 끝에 매달려 내복 아래 내 살갗을 누르고 있었다. 네 가닥의 머리카락.
--- p.347

우리는 베로니카의 방에서 핍을 데려왔다. 테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녀석에게 군집지를 모두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핍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로 돌아가 혼자서 살아남아야만 할 것이다. 가끔 우리는 ‘어린이집’에 핍을 놓고 왔다. 부모 펭귄들이 물고기 사냥을 나간 사이 어린 펭귄 무리가 모여 있는 곳을 과학자들은 그렇게 불렀다. 핍은 점차 용감해졌다. 다른 새끼 펭귄들과 터덜터덜 돌아다니는가 하면, 잡기 놀이도 하고 웅덩이 뛰어넘기 같은 장난도 했다. 매번 핍을 데리고 나올 때마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핍을 계속 지켜보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나는 할머니가 어떻게 저 펭귄과 헤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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