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 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 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 '걷는 동학' 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 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궁금하다. 장일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고, 30대 초반에는 '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삼십 대 중반에는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 장일순은 그 뒤로 '파워 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 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말하자면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고, 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 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살림의 세계관, 곧 생명의 세계관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우리 겨레의, 아니 전 세계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고, 요컨대 평생 돈벌이 한 번 하지 않고 했는데도 부부간이나 가족이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제가와 평천하를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잘 아울렀다.
거기에는 가문의 힘도 있었다. 장일순은 3대를 통해 핀 꽃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쳤고, 할아버지는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흔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할아버지를 '낙타를 타고 바늘 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러웠다. 부드럽되 한 마디, 한 행동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일년 내내 빌 틈이 없었다.
단 한 번을 보고 장일순에게 크게 반했다는 김종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땅의 풀뿌리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쳤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지금 단순히 동학이나 천도교의 스승이 아니라 이 겨레, 이 나라 사람들 전체의 스승이듯이 장일순 선생의 자리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