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된 정부의 관료 형태가 성공을 거둔 것은 상당 부분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초원 지역의 침입을 막아 내기 위해 중국 북부는 잘 훈련된 대규모의 전투력을 배치할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였다.
한대 훨씬 이전부터, 중국의 외부 세계와의 접촉은 교역과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비단과 칠기와 같은 중국 상품들은 이웃 나라들의 상품보다 뛰어나서 중국 물품에 대한 수요가 창출되었다. 일부 국가들은 그 대가로 목재, 말, 양, 소 등의 상품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흔히 침략이 교역의 대안이 되었다.
무력으로 원하는 물품을 획득할 수 있음을 알게 된 비한족 집단들은 교역을 하려는 의욕이 별로 없었다. 더욱이 평상시에는 기꺼이 교역을 하려던 나라들도 이전에 확립된 교역 관계가 깨지거나 가뭄으로 인해서 절망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면 침략에 의존하게 되었다. 비한족의 침략을 막는 일이 상대 이래의 골칫거리이기는 하였지만, 주나라 중기에 중국 본토 북쪽의 건조한 초원 지여게 유목 생활이 증가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이 한층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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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수천 년 동안 형성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이며, 중국의 현재는 과거를 알지 못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을 정적이거나 또는 변하지 않는 사회로 보는 옛 서양의 견해와는 달리, 중국이 어떻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나라로 발전했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 시기마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의지를 살리면서 물려받은 것을 최대한 살렸고, 그들은 의무에 충실히가 위해 새로운 사상과 관행들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사회가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항상 이전과는 다른 식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지녔으며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혀재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국경 내로 포함된,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채게서 중국문명의 여상에 초저믕ㄹ 맞추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은, 이웃 민족들이 한족을 통치했을 때 이웃 민족과의 조우가 한족과 중국의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의미를 축소시키기는 하였지만, 한민족의 국가 또는 한족의 지식인으로 좁히지는 않았다. 즉 내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중국 민중과 그들이 창조해 낸 문화인 것이다.
--- 서문 중에서
저자는 한에서 송까지의 중국 가족과 친족 분야에서 으뜸가는 학자로서, 송의 군주들과 철학자들이 규정한 관례, 혼례, 장례는 물론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사회-관료 엘리트의 문화적 사회적 외양을 꼼꼼하게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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