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내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 전쟁은 과두 정치 세력이 앞장서 벌이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사회적 권리 축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외국인에게서 모든 종류의 시민권을 박탈하고자 하고 망명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민족적이며,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범죄화하기 위해 법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법적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강성 보수주의가 도덕 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공격할 때, 이 전쟁은 문화적이고 도덕적이다. 둘째, 이 전쟁에서 각각의 전략은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각 국가나 지역의 특수한 전략들이 범세계적인 단일 전략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셋째, 이 전쟁은 패권주의 강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글로벌 질서’와 블록화한 국가들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이 아니다. 두 정치체제 간, 두 경제 시스템 간의 대립도 아니다. 이 전쟁은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는 미리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분열, 그중에서도 가장 해묵은 분열을 수단으로 삼아 매번 획득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종류의 이원론적 도식은 힘을 잃는다.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중에서
신자유주의가 가하는 폭력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사회에 대항해 시장 질서를 보호하는 폭력의 성격을 띤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 질서는 경제정책을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시민-소비자 개인의 책임과 자유에 기초한 문명 전체가 달린 문제다. ‘자유 사회’는 이런 기초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모든 특권을 가지고 독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가 된다.
---「서론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중에서
신자유주의의 모든 조류는 ‘인민주권의 신화’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초를 세운 선구자들(루이 루지에, 월터 리프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신’, 즉 여론의 지배 혹은 대중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며, 인민주권 도그마의 유해한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의 선택과 사적 소유라는 최상위 원칙을 존중하는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다. (...) 인민, 보통선거, 다수결 원칙, 정치적 다원주의, 분배 정의, 공공 교육, 빈곤층을 싸잡아서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거부하기도 힘들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근본적으로 대중을 혐오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무제한적’ 혹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구별하며, 전자를 수단으로 후자를 무력화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다.
---「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중에서
권위주의의 형태 혹은 동원되는 폭력의 강도 등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강한 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카를 슈미트의 표현에 따르면 ‘강도’의 차이다. 강한 국가의 한계는 인위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장에 대한 적의 위협에 따라 비례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특정한 신자유주의만을 가리켜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치 않다. 시장경제를 규제하기 위한 모든 민주주의적 의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이미 내재적으로 권위주의적이다. 국가의 힘을 사용하는 형태가 다를 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반복해서 말했다. 독재와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단지 자유경제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강한 국가는 파시스트 국가와 구별된다. 반대자들에 가해지는 노골적인 폭력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원칙이 아니라 맥락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미제스가 설명하듯이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 국가는 시장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파시스트 폭력에 의존하는 것도 가능하다.
---「3장 강한 국가 예찬」중에서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는 자유경제에 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정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자신의 앙숙인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은 이데올로기와 문화 영역에서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법과 조치, 제도의 확립을 통해 향후 어떤 사회주의적 정책들도 도입할 수 없게끔 방벽을 세우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중심 목표는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패퇴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노동조합을 약화하고, 국가의 사회복지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5장 신자유주의와 그 적들」중에서
진보주의적 신좌파가 인민계급을 저버리고, 우파가 인민계급의 가치(노동, 능력, 가족, 권위)를 회수함으로써 각 사회 계급이 정당들과 맺는 관계가 재정의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신자유주의의 가장 반동적인 버전이 현재까지 인민계급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를 물었다. 이 성공은 신자유주의가 독(유대 관계 해체,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과 해독제를 동시에 만들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파가 제시하는 해독제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 조용하고 성실한 이웃, 규범을 준수하고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착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우리’라는 주문을 다시 외게 한다. 모든 계급, 특히 인민계급을 단일한 국가에 통합하는 이 통일 서사는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즉, 사회를 다시금 상상의 공동체로 만들고, 주권 국가를 다시 이상화하며, 개인적 자유를 급진적으로 추구한다. 이 전략을 ‘우파 포퓰리즘’이라고 지칭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이 표현은 그 스타일과 레토릭을 강조해서 보여주지만, 우파 전략의 복잡한 효과를 충분히 반영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들의 전략은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대로 ‘하나의 인민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을 분할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인민계급 일부가 노동자 운동의 모든 성과와 복지국가, 노동법, 노동조합에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우파는 전략적으로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의 충동을 자극함으로써 인민계급이 지배계급에 저항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일부 인구 집단이 자신들의 상황이나 기대 이익을 위협한다고 믿는 다른 인구 집단에 대해 지니는 증오를 부추김으로써, 이 전략은 ‘인민’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분할하고, 화해 불가능한 정체성을 지니는 공동체들로 분해해버린다.
---「8장 가치 전쟁과 ‘인민’의 분열」중에서
이 전쟁은 단순히 경제적 지구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유연화와 불안정화에 따른 담론과 실천, 주체화의 형식 차원까지 아우른다. 바로 이 차원이 경제적, 정치적인 만큼이나 정신적이고 내밀하기도 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겨냥하는 지점이자 전선이다. 이러한 공격은 일반적으로 단지 법과 노동을 재조직해 새로운 노동 규범을 강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방 혹은 자기실현이라는 매력적인 말로 포장하여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간다. 또한 ‘계급의식’이 출현할 만한 조건들을 파괴함으로써 현재의 투쟁들을 개인적 투쟁으로 축소해버린다. 이제 개인은 타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며 두려워할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대다수가 패자가 되는 게임의 규칙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의 적이 된다.
---「9장 노동 일선에서」중에서
이 책 전체에 걸쳐 언급되는 ‘내전’은 과장된 수사가 아닌 현실이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권력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해지는 경찰력과 사법 당국의 탄압은 이 전쟁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여기서 국가 폭력의 대상은 단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시장 질서의 근본법을 위협하는 모든 사람이 ‘무정부주의자’ 혹은 ‘테러리스트’로 규정되며, 적으로 간주되어 국가 폭력의 대상이 된다. (...) 사회적 타협의 종말, 협상의 길의 점진적 소멸, 사회적으로 완전히 퇴보적인 법률의 ‘토의 없는’ 강요 등이 새로운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서 행해지는 반대자들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적 행위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노동자에 대한 폭력이 극에 달했던 19세기로 퇴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신자유주의 전쟁은 시장 질서와 그 질서를 보호하는 국가의 반대자들을 자극하며, 갈수록 신자유주의 국가가 그 질서에 잠재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벌이는 투쟁이 되어간다. 종국에 이 전쟁은 국가가 그 구성원에 대항하여 벌이는 전쟁이 되어버린다.
---「10장 반민중적 통치」중에서
신자유주의는 법을 경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자유주의 주류는 그 출발부터 시장경제의 적절한 작동을 위한 법적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유방임적 자연주의와 선을 그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개인의 행동은 헌법화된 근본 원칙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개인 간 상호 관계와 법적 결정에 따라 발전하는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반드시 군사적인 것만은 아니며, 오직 군사적인 것도 아니다. 이 전쟁은 모든 영역, 모든 제도, 모든 담론을 가로지른다. 이 전쟁은 권력관계를 구성하며, 피지배자의 저항과 반란의 형태뿐 아니라 지배자의 탄압 형태에도 관계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따라서 법은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전쟁의 수단이다.
---「11장 신자유주의 전쟁 기계로서의 법」중에서
신자유주의를 그 기원에서부터 특징짓는 것은 몇몇 근본 특성들의 놀랍도록 지속적인 결합이다. 재분배를 위한 사회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 반민주주의, 강한 국가 추구, ‘자유의 적’에 대한 폭력, 시장 입헌주의, 경쟁 예찬 등이 그 특성의 예다. 이 특성들은 계속해서 상호 결합하며, 여기에 (항상은 아니고) 자주 가족, 종교, 도덕 질서 같은 보수주의적 가치에 대한 지지가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하듯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실재하는 신자유주의’, ‘변종 신자유주의’ 등으로 신자유주의를 범주화하는 게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립의 경계를 이동시켜 인구의 일부가 권위주의를 지지하게 만드는지, 혹은 역으로 어떻게 ‘진보주의자’의 열망을 전유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연대, 평등을 후퇴하게 만드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관건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의 전략적 차원에 주목하여, 신자유주의 권력이 내전의 정치를 통해 기능하는 다양한 방식을 파악하고자 했다.
---「결론 내전에서 혁명으로」중에서
신자유주의 전략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국가 폭력의 사용, 권위주의, 과격성 등을 현재의 신자유주의만의 새로운 특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드러난 신자유주의의 변화를 권위주의적 일탈로 해석할 경우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전략적 특성을 놓칠 수 있다. 이 새로운 전략은 이미 앞에서 살펴봤듯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 현상에 의존한다. 첫째, 현대 신자유주의는 두 분파로 양분된다. 차이를 존중하고 자아실현을 약속하는 다소 진보적인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와, ‘국민 정체성’과 혼동되는 자유를 내세우며 소수자들의 요구 및 법적 성취를 억압하는 반동적인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가 그것이다. 둘째, 이러한 두 신자유주의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인민은 자기 자신에 대항하게 된다. 이 전쟁 속에서 매우 다른 두 개념의 자유가 마치 무한한 거울 반사처럼 서로에게 시대적 악의 책임을 돌린다. 현대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공론장 전체를 포화 상태로 만듦으로써 모든 진정한 인민적 대안을 막는다.
---「결론 내전에서 혁명으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