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열여덟의 내가 꿈꾼 스무 살의 모습은 이게 아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그 소녀에게만큼은 떳떳한 내가 되고 싶었다. 무엇이 되었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가슴 뛰는 일을 쫓아가자. 내가 꿈꾸던 스무 살이 되어보는 거야! 그렇게 나의 찬란한 스무 살의 첫 페이지가 시작되었다.
내 인생에서 학교가 사라졌다. 해가 지날 때마다 작아졌던 교복도, 그래서 더 자주 입었던 체육복과 매점에서 매일 사먹던 소보로빵,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급식실도 이제 없다. ‘우물 밖 여고생’이라는 정든 별명과 ‘몇 학년 몇 반’, ‘학생’이라는 수식어와도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 뭘 해야 하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나침반을 잃어버렸다. 길을 잃는다는 건 새로운 길을 찾는 방법이기도 했고, 목표가 사라진다는 건 새로운 목표가 생겨 가슴 뛸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뭐라도 해보면 된다. 한 입 깨물어 보기 전에는 그게 무슨 맛인지 모르는 것처럼, 손가락을 담그기 전에는 물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모르는 것처럼, 길이란 건 걸어보기 전에는 절대 모르는 것이다.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밍글라바!” 인사를 하다 보면 어느새 많은 친구가 생겨 있었다. 혼자였지만 사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언젠가 내가 다시 만달레이에 온다면 그건 아저씨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번호를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해진 지폐를 펴서 드리니 이건 너무 많다고 손사래를 치는 아저씨께 부디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다고, 그러지 못해 마음에 걸려 그런다고. “그리고 최고의 하루를 제게 주셨으니까….”
냄새의 정체는 태국에서 알 수 있었어. 냄새가 고약하기로 유명한 과일 두리안이었더라고! 생각해보니 길거리에서 두리안을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 상인이 정말 많았어. 이후에 많은 나라에서 두리안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항상 미얀마가 떠올라. 그래서 나에게 두리안은 미얀마 냄새야.
저는 여전히 여행이 인생을 바꿔준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걸어왔던 그 길 위에는 늘 배울 것이 있었다는 걸, 그것들이 저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건 알아요.
여행을 좋아하지만, 실은 여행할 때의 제 모습을 더 좋아해요. 뭐랄까, 숨통이 좀 트인달까요. 저를 작아지게 만드는 것들에서 벗어나 온전한 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껴요.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그곳, 타지에서요. 이 공간에서 ‘나’는 그냥 ‘나’일 수 있어요.
‘나, 꽤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맞아요. 저 보기보다 괜찮은 녀석이에요. 생각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구요. 행복할 줄 아는 멋쟁이였어요. 여전히 남 시선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적어도 저의 가치를 타인에게서 찾는 일은 그만둘래요. 그들의 피드 속 화려한 삶에 ‘좋아요’를 누르기보단 이제는 제 삶을 더 좋아해줄 거예요. 날 사랑해줄 거예요!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 수줍게 올라가는 입 꼬리, 내 인사에 반응하는 작은 손바닥…. 결국 내가 바란 건 이토록 사람답고 소심한 것들이었다. ‘제발 나를 좀 안아주세요.’ 하고 마음으로 애절하게 소리치고 있던 거였다.
지나가는 택시 한 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다 이 길목에서 가장 큰 건물에 들어갔다. 은행이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손짓 발짓을 써가며 도움을 청했다. 은행직원, 업무를 보던 손님, 너나 할 거 없이 길을 잃은 날 위해 머리를 맞댔고, 그들은 종이에 그림 한 장을 그려 내게 쥐어주었다. 그렇게 찾아낸 썽태우 정류장.
낮잠을 자는 나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하는 아이들. 차를 기다리는 줄 알고 굳이 자는 나를 깨워 오늘은 차가 없다고 알려주는 젊은이들과 내일 내가 탈 밴 아저씨를 데려와 날 빼놓지 말라고 당부하는 슈퍼 아주머니, 번역기를 들고 와 내게 라오 말을 가르쳐 주는 아저씨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이곳에서 대체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나 막막했는데,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냈다.
저마다 그 나라를 맛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모두가 시그니처 메뉴를 고른다고 해서 나까지 그걸 집어들 필요는 없다. ‘한 입만!’ 하고 입을 벌려볼 사람은 이미 충분히 많으니까. 가끔은 그냥 이름이 예뻐서, 생긴 게 귀여워서,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같은 단순한 이유대로 행동해도 괜찮다. 생각보다 얻어 걸릴 때가 꽤 많다.
“나는 슬기 네가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거 같아 그게 너무 슬퍼.” 너의 말에 내 샘에 쌓아둔 둑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오랜만에 아이처럼 펑펑 울었어. 약해보이기 싫어서 꾹꾹 참았던 것들이 어느새 내 감정들을 고장 내기 시작한 거야.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게 그리 어려웠을까.
나의 스물은 핑크빛으로 가득할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내 스물은 노랑이었다. 단순히 귀엽고 유치한 매력이 있는 색이라 여겼었는데, 나의 노랑은 닭이 되려는 병아리 같기도, 귀엽게 매달린 망고 같기도, 반짝거리는 별 같기도 했다.
내 삶 곳곳에도 작은 초코바 하나쯤 숨겨놓는 게 좋겠다. 나의 허기짐을 달랠 수 있도록, 도저히 참지 못할 것만 같을 때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낼 수 있는 여행의 조각, 나의 사람들, 고양이나 노래쯤은 달콤한 초코바로 만들어 숨겨놓는 게 좋겠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돼요. 잘 다져진 고른 땅과 비포장도로 사이에서 고민하는 게 바보같이 느껴지겠지만, 저는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할 때가 많아요. “편한 길을 놔두고 대체 왜?!”라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나도 몰라! 그냥 가보고 싶었어!”랍니다. 그래요, 제 스무 살이 그렇습니다. 얼렁뚱땅 막무가내 휘청휘청, 하지만 끝내 반짝일 거라고 굳게 믿어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우리 모두 스무 살은 처음이잖아요!
여행을 통해 나는 꽤 많은 걸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라면 하나 겨우 끓이던 게 요리한답시고 칼을 들 줄은, 넘어지는 게 무서워 배우지 못했던 자전거를 걷기 힘들다고 혼자 배워버릴 줄은, 조동사가 뭔지도 모르는 내가 외국인에게 영어로 세종대왕을 자랑하게 될 줄은, 혼자선 물장구도 못 치는 내가 대뜸 바다 속으로 뛰어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마음을 주는 일은 그런 것이다. 눈동자 색을 들여다보는 것. 살결이 내는 특유의 향에 코를 문지르는 것. 각자 새긴 타투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 얼핏 보면 쉽겠으나 실은 당신이 내 영역에 들어왔다는 속삭임이었다.
매일 봤던 풍경, 매일 만났던 사람들, 그래서 모든 게 예상 가능한 게 여행이었다면 난 이만큼까지 여행을 사랑하지는 못했을 거 같아. 그래서 이제는 내 우물 안이 너무 소중해. 난 할머니가 되어도 이 세상이 여전히 놀랍고 또 사랑스러웠으면 좋겠거든. 야금야금 아껴먹을 거야. 욕심 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도 주면서 말야.
‘음, 난 저거 못해!’ 스스로의 한계를 쉽게 단정 짓던 겁쟁이인 슬기가 한 발 두 발 내딛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재밌던지. 못하는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못할 수 있지 뭐! 그런데 대부분 할 수 있더라. 한 발 두 발, 그렇게 걷다 보니 결국은 정상이더라. 못 하는 게 아니라 한 걸음 떼는 게, 그게 참 힘든 거였더라.
인생이 야구라면 우린 아직 1회는커녕 이제 막 애국가 부르고 시구하는 중인 거예요! 9회 말 투아웃, 주자 만루의 대역전 상황에 놓인 게 아니라구요. 배트 잡는 법도 막 배운 우리가 왜 자꾸 만루 홈런을 치려고 하는 거죠?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