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안정법’ 입법 과정 __
7월 19일, 전두환 대통령이 새삼스럽게 “미국문화원 사건 공판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정부나 당에 마치 강온 양론이 있는 것처럼 비쳐선 안 된다. 방침이 결정되면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앞으로 있을 모종의 조치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학원안정법’이라는 이름의 입법 시안이 내 손에 들어왔다. 학생 약 5000명을 수용해 순화한다는 내용이었다. …… 나는 그 법안 자체가 못마땅했다. 이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이 있고 어마어마한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계속 법을 만든다고 학원 소요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 이처럼 여당도 납득시키지 못한 법률안을 놓고 안기부가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정부는 8월에 임시국회를 열어 학원안정법안을 상정해 통과시킨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원내총무인 나에게는 아무 사전 협의도 없었다.
7월 30일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온 기자들이 8월 임시국회를 소집하느냐고 집중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시급한 민생 법안을 처리하는 국회라면 소집해야겠지만 학원안정법을 위해서는 아직 소집할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것이 또한 괘씸죄에 해당했다.
그날 마침 미 국무부에 있는 나의 친구 앨런 롬버그가 방한했다고 해서 미국 대사관의 클리블랜드 부대사와 함께 오찬을 했다. 그 자리에서 클리블랜드 부대사가 불쑥 비꼬는 투로 “수용소(gulag) 계획은 잘 되어가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수치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 p. 34~36
전두환은 왜 내각제를 염두에 뒀는가 __
전두환은 누구보다 노태우를 잘 알고 있었다. 비록 12·12의 동지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과연 그가 국가를 맡아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 같다. 나아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가 끝까지 의지를 지켜 자신(전두환)을 보호할 마음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시중에는 “‘노’는 ‘노’인데 ‘노태우’는 아니다”라는 루머가 떠돌며 노신영 국무총리가 후계자가 된다는 풍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전두환의 두터운 신임을 업고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장세동 같은 야심가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두환은 한때 내각제 개헌으로 방향을 선회할 의사도 있었다.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뀌면 노태우의 집권은 사실상 물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야당이 일관되게 ‘직선제 대통령’ 개헌안을 들고 나오면서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전두환의 내각제 개헌론이 야당의 공세를 둔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은 진정으로 내각제 개헌을 할 마음이 있었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간혹 내각제 개헌 문제가 거론되곤 했다. 왜 그랬을까? 내각제가 되면 권력자가 임기가 끝난 뒤 사후 보장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원내각제는 국회가 권력의 중추이기 때문에 대통령제처럼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그런 구조에서는 정치 보복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더라도 자기 계파의 국회의원을 다수 확보하면 사후에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제를 주장하던 사람도 임기 후반에 이르면 내각제를 선호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것 같다. --- p. 40~41
이미 쓰여 있던 차기 대권 시나리오 __
다음 날 정식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시나리오대로 후보 추천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노태우 대표는 자기가 관련된 사항이므로 불참했고, 임방현 중앙위의장이 사회를 맡았다. 모두 박수로 노태우 대표를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결정했다. 회의는 20분 만에 끝났다. 이어 추천위원 명단에 서명하는 회람이 돌았다.
이때 옆에 앉았던 유학성이 감회 어린 듯 “오늘이 있기까지 6년 11개월이 걸렸습니다”라고 독백처럼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유학성에게 캐물었고, 그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1980년 6월 27일 오전 11시 10분, 내가 중앙정보부장으로 가기로 하는 합의가 이뤄지던 그날 그 시간에 다음번 주자는 ‘노태우’라고 이미 모두 약속이 되었어요. 그런 것이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야 실현되었으니 나로서 감회가 깊지 않겠어요?”
유학성은 얼떨결에 비화를 털어놓았다. ‘아, 12·12 주체들이 모여서 이미 대통령의 순번을 결정해놓았군!’ 나는 그 사실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 p. 48~49쪽
6·29 선언의 드라마 __
노태우는 한동안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지난번 자네가 한 말처럼 대도를 걸을 결심을 하고 있네. 국민이 바라는 것을 필요하다면 수용할 생각이네.” …… 나는 노태우가 지난번과 달리 태도가 상당히 바뀌어 있음을 느꼈다. 나중에 들으니 전두환 대통령은 그때 이미 국면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바로 그 전날 노태우에게 “직선제로 정면 돌파하자”라고 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노태우는 이제 직선제를 받아들여야 할 시점임을 깨닫고 박철언과 이병기에게 은밀하게 시국선언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그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
6월 29일 아침, 당사에 도착했다. 이춘구 사무총장을 비롯해 누구도 이날의 의제에 대해 말이 없었다. 드디어 노태우 대표가 회의장에 나와 마이크를 정리하고 침착하게 6·29 선언을 읽어 내려갔다. 선언의 원명은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이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사후에 배포된 유인물은 급조한 탓인지 필경체의 복사본이었다. 나는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이 핵심이라고 보고 그곳에 밑줄을 쳤다. 유인물 말미에 “만의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라는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참으로 감격적이었다. 기자들도 허를 찔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송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태우는 선언 직후 국립묘지에 참배한 데 이어 그 길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외쳤던 충무공 이순신의 아산 현충사를 찾았다. 여기서 그는 ‘백의종군의 심정’, ‘구국의 정신’, ‘역사와의 대화’ 등 감회 어린 표현으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마치 청와대에서 거부하는 직선제를 자기 의지로 수용하고 이를 역사에 맡기는 것 같은 자세였다. 현충사 참배 뒤 뒤쫓아 간 기자들이 “이 구상을 사전에 전두환 대통령과 상의하지 않았느냐?” 하고 묻자, 그는 “내가 발표문에서 앞으로 건의를 드리겠다고 말했지요?”라고 반문했고, 다시 “언제 대통령을 직접 만날 생각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당에서 당론으로 안 받아들이면 모두 허사지. 그러면 건의고 뭐고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 p. 57~59
개헌과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__
6·29 선언 이후 새 헌법안 작성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에게는 여러 가지 주문이 전달되었다. 특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나를 직접 불러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을 잇는다는 내용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합니다. 이 일을 이 의원 말고 누가 하겠소. 현재 민주당안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는데, 민정당안은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어요. ‘정신’과 ‘법통’이라는 두 글자가 대단히 큰 의미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서 틀림없이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으로 반영해주시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다음 날 나는 헌개특위 위원인 허청일 의원에게 먼저 헌법 전문에 관한 각종 자료를 전달하면서 이 같은 입장을 반영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허 의원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 부정적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헌개특위 간사인 현경대 의원을 찾아가 같은 요구를 했다. 그는 이해가 빨랐다. “동감입니다. 저에게 맡겨주시지요.”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하여 1987년 10월 29일 채택된 현행 헌법의 전문은 아주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p. 64~65
이종찬과 3당 합당, 그리고 김대중 __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발표했다. 민정당의 창당 주역이자 원내총무와 사무총장, 정무장관을 역임한 나에게 일언반구 의견을 물은 일이 없었다. 중간평가가 물 건너간 뒤 언론 등을 통해 ‘합당을 통한 정계 개편’이 시도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합당’이라고 하면 고작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 정도를 상상했을 뿐이었다.
나는 합당보다는 유럽식 ‘정책 연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정책 연합’의 우선순위는 김대중의 평민당에 있었다. 내가 정치에 몸담은 5공 시절 이후는 물론이고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나는 그를 ‘용공(容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 그는 민주사회주의자도 아니고 미국 민주당의 ‘리버럴’ 정도였다. 하지만 지역적으로는 호남의 소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정책 연합의 순서는 평민당부터 협의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 나는 그래서 박철언 정무장관에게도 “이왕 정책 연합을 하려면 지역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정책 연합 시 평민당과의 우선순위를 권유했었다. 하지만 정계 개편은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까지 끌어들여 호남을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3당 합당은 1987년 제13대 대선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감정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코너로 몰리자 김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재야 운동권 출신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가 이끄는 야당은 점점 더 보수 야당의 전통에서 멀어졌다.
나에게 3당 합당 사실이 정식으로 통보된 것은 1월 21일이었다.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나자고 해서 삼청동 안가로 갔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특별히 나를 설득하라고 시켰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긴말 않고 “여러 가지 심정을 이해하지만 이번만은 노 대통령의 뜻에 따라 달라”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 2월 1일, 민정당은 당 해체를 결의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말 한마디 못 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역사의 증언으로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겼어야 옳았는데 나는 그 전날 노태우 대통령의 당부를 홍성철 실장을 통해 듣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내가 그 자리에서 민주당의 김상현이나 노무현처럼 강력하게 항의하지 못한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 p. 143~146
청와대의 박태준 비토 __
“저는 원래 자유경선제를 주장했지만 지금의 형세는 민정계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 주자로 박태준 최고위원을 밀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이 의원! 박태준 최고위원은 안 됩니다.”
“우리 민정계의 수장인데 왜 안 됩니까?”
노 대통령은 뒷조사를 통해 확보한 박태준 최고위원의 약점을 이야기했다. 나로선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공개되면 박 최고위원에게는 대단히 난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런 정보가 자기 앞에 놓인 문서 봉투에 들었는지 내용은 보여주지 않은 채 그 봉투를 탁탁 쳤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뭔가 박 최고위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가 있음을 직감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 이야기를 입증할 만한 그 이상의 정보나 자료를 나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이대로 김영삼에게 모든 것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오랫동안 자유경선제를 주장했습니다. 박 최고위원의 출마를 반대하신다면 아무런 준비는 안 됐지만 저라도 나가야겠습니다. 자유경선이니까 누구라도 뜻이 있으면 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김영삼 대표에게 독상을 차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노 대통령이 나의 출마도 반대하리라고 예상했는데 그는 의외로 나를 응시하면서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네”라고 쉽게 답했다.
그런데 청와대 면담 직후 대화 내용이 와전되어 흘러나왔다. 내가 노 대통령에게 박 최고위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전하면서 ‘박 최고위원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청와대였다. 노 대통령의 복잡 미묘한 행태에 내가 또 한 번 걸려든 것이었다. --- p. 156~157
김종필의 4·8 밀약 __
김종필은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 청와대를 나왔다. 그는 변신의 명수였다. 즉각 김영삼의 경선 본부가 차려진 하얏트호텔로 갔다. 아마 김영삼은 그때 김종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성질 급한 김영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후보가 되면 운정(雲庭: 김종필의 호)이 당을 맡아주시오.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습니다.”
“당권은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몇 가지 다짐합시다. 집권하면 정부를 내각제 정신으로 운영하겠습니까?”
“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과거 야당에서 하듯 모든 것을 급속하게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현존하는 모든 체제는 경제 발전 단계부터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나온 것인데 이를 하루아침에 바꾸면 큰 혼란이 생길 겁니다.”
“운정의 말을 알아듣겠습니다. 3당 합당의 정신이 지금까지 있던 정부를 지키라는 뜻으로 알고 운정의 말을 존중하겠습니다.”
김종필은 그 순간 김영삼이 매사를 너무 쉽게 받아들여 오히려 불안했다. ‘이 사람은 내각제 각서를 쓰고도 오리발을 내밀었는데 약속이 무슨 쓸 데가 있을까?’
“거산(巨山: 김영삼의 호)! 내가 출마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리고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소.”
김종필은 청구동으로 돌아왔다. 이날 김종필과 김영삼의 전격적인 회담을 두고 ‘4·8 밀약’이라고 부른다. --- p. 164~165
김옥숙 여사와 아내의 만남: “노심을 파세요” __
경선이 점점 가열되면서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김복동 선배가 다시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 자신도 많은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도 김영삼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 같았다. 김영삼 측은 어떻게 하든지 노태우 대통령의 주변 인척을 포섭해 간접적으로 노심이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비겁한 방법을 활용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나의 아내가 5월 11일 광주 집회가 열리는 날, 청와대로 김옥숙 여사를 찾아갔다. 나와는 사전에 전혀 의논하지 않았다. …… 그날 아내는 김 여사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만약 꼭 김영삼 씨를 후계자로 시키고 싶다면 영부인께서 솔직하게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우리는 꼭 대통령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도 제가 이 의원을 졸라서 후퇴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경선이 과열된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중립입니다. 내가 금진호 장관이 김영삼 씨 측 행사에 나가기 때문에 각하가 오해받는다 해서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권했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김윤환 의원이 ‘이미 노심은 결정되었다. 이번 경선은 하나의 축제판으로 끝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김 의원은 누가 보더라도 각하의 측근 아닙니까? 그러니 이 판에 끼어서 우리가 욕먹을 일이 없지 않겠어요? 영부인께서 저에게만 말씀하세요. 그러면 우리는 미련 없이 중단하겠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정말로 나는 중립이에요.”
이 말을 듣고 아내는 너무 앞질러 진심을 말해버렸다.
“사실, 김영삼 씨를 믿지 마세요. 그가 무엇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각하의 사후를 보장하겠다 해도 그에게는 오늘까지 지내온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김영삼 씨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예요.”
김옥숙 여사는 일순 심각해졌다.
“일가들 가운데 김영삼 씨는 믿을 수 있다고 하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어요. …… 김윤환 의원이 그런 것처럼 이 의원도 오늘부터 노심을 파세요. ‘각하의 본심은 나였다’라고 하세요. 그러면 서로 의견이 엇갈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르게 되지 않겠어요?”
“그건 안 됩니다. 저희들이 그런 말을 하면 대부분 웃긴다고 할 거예요. 하여간 더 이상 노심 파는 행동은 자제시켜주세요.” --- p. 192~194
노태우와 김영삼의 갈등, 그리고 노태우의 민자당 탈당 __
내가 탈당하자 민자당이 흔들리며 복잡해졌다. 그러나 더 이상 김영삼과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 공동체 전체가 오염되고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내 나름의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그 무렵 김영삼 총재 체제의 민자당에서 또 사고가 터졌다. 총선거 후유증의 일환이었다. 8월 31일, 충남 연기군 군수였던 한준수가 지난 14대 총선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임재길을 도우라는 상부 지시를 받아 자신이 직접 관권선거를 지시하고 행동했다며 그 전모를 폭로했다.
야당은 즉각 총공세에 들어갔다. 공세의 표적은 김영삼 후보였다. 그는 당시 총선거는 자기 책임하에 치른다고 공공연히 말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김영삼은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기자회견에서 관권선거를 시도한 임재길 후보를 구속하라고 역습했다. …… 김영삼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치 국면 전환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수세로 몰린 여당을 일신하기 위해 총리를 포함한 중립적인 선거 내각으로 개각하라고 요구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했다. 모든 책임을 노 대통령에게 돌리려는 태도였다.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발언이었다. 당시는 정원식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연형묵 총리와 남북기본합의서 세부 실천 사항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는 민감한 시점이었는데, 김영삼은 이런 정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선에 나간 총리의 방석을 빼내 골탕을 먹인 격이 되었다.
노태우는 그제야 김영삼이라는 사람의 본심을 알았다. 그와 자신의 사후 보장을 밀약한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알았다. 9월 18일, 김영삼 후보와 사후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동하는 자리에서 노태우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개각을 단행해 중립내각을 구성할 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도 탈당하겠다는 결심을 기습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말에 김영삼은 당황했다. …… 그때 김영삼도 노태우와 갈라서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이때 생긴 감정의 골이 훗날 김영삼 정권에서 노태우를 구속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 228~229쪽
DJP 연합 과정에서 드러난 김종필의 이중 플레이 __
그해 9월 김우중 회장이 북한 진출 사업을 위해 평양에 다녀온 뒤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자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때 권 부장이 “김대중이 집권하면 우리 경제는 완전히 깨지고 만다. 어떤 방법이든 막아야 한다”라면서 김 회장이 자민련 교섭 창구인 김용환과 친하니 단일화를 포기하도록 그를 잘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같은 것이었다.
김우중은 당황해 즉시 김용환을 찾아 권 부장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김용환은 이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김용환에게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이미 전해인 1996년 말, JP의 지시를 받아 DJ를 따로 은밀히 만나 내각제를 전제로 한 DJP 공조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 그런데 그 순간에도 JP가 뒤에서 이중 플레이를 하는지는 김용환도 몰랐다. JP는 YS와 따로 내각제에 합의하고자 추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매일경제≫에 JP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국가가 편안해지려면 김영삼 대통령이 영단을 내려 중대 결심을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대선을 중지하고 비상사태라도 선포해 내각제 개헌을 하라는 압력이었다. 김용환도 놀랐다. ……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가니 김용환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즉각 당 사무국에 있는 측근 송업교에게 확인했다. 송업교는 JP의 밀명에 따라 서울 시내에 사무실을 차리고 헌법 개정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청와대와 JP가 보낸 인물들과 권영해가 파견한 안기부 요원까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유신헌법을 만든 한태연 교수도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용환만 이런 음모를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 권영해 부장이 김우중 회장을 통해 전한 협박은 결국, “JP와 다 합의된 사항인데 왜 김용환, 네가 초를 치느냐? 이제 그만둬라!” 이런 뜻 아니었겠는가? --- p. 337~338
대통령 당선 직후 김대중과 클린턴의 통화 __
국립묘지에서 돌아온 김대중 당선자는 국회 야당 총재실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통화했다. 통화하는 동안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예상외로 통화가 길어지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축하 전화라면 길어야 10분일 터인데 아무리 통역 시간을 감안해도 너무 긴데….’ 약 40분이 지나 총재실을 나서는 김 당선자의 얼굴이 흙빛이었다. 불쾌함이 역력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일산에 가 있겠소.”
한마디만 남기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통역을 담당한 강경화 씨의 표정을 살폈다. 겨울 날씨임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런 통역은 처음입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강경화 씨가 속기했던 메모장을 열어 설명해준 통화 내용은 ‘축하’가 아니라 ‘강경한 힐난’이었다. 클린턴은 축하 인사말은 두어 마디뿐이고 직설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당신이 말한 IMF와의 재협상이 많은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루속히 당신이 한 말을 정정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김대중 당선자는 변명도 아니고 항변도 아닌 어중간한 답을 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답변하기에는 이야기가 좀 깁니다.” --- p. 376~377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새로운 부훈,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탄생 배경 __
개혁의 두 번째 과제는 부훈(部訓) 개정이었다. 안기부는 1961년부터 1998년까지 장기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부훈을 지켜왔다. 이 부훈은 김종필 초대 부장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음지라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는 나에게 “음지란 정보기관의 음산한 배후를 가리키는 것 같아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라고 했다. …… 정보이론의 대가인 셔먼 켄트는 “정보란 지식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부원들의 여론을 조사하고 켄트의 정의를 원용해 “정보는 곧 국력이다”라고 부훈을 정했다. 최종 결재 단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곧’을 빼고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고쳐 재가했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아주 잘 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올바른 정보를 많이 가진 나라, 다시 말해 지식을 많이 축적한 나라야말로 부강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강한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세계 인구의 0.2%밖에 되지 않는 유대 민족이 노벨상의 20%를 휩쓰는 것은 그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고 활용하는 일에 능하기 때문이다. 활어처럼 생생한 정보를 확보한 나라가 강한 나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정신에 따라 부의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원훈부터 바꾸었다. 원훈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김대중 대통령 때 만든 것이라며 무조건 없앴다. --- p. 426~427
‘북풍’과 ‘총풍’ __
나는 북풍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마무리하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공작원 같지도 않은 윤흥준을 앞세워 말도 안 되는 북풍 사건을 기획하고 거기에 귀중한 정보 예산을 퍼 넣었던 바보 같은 짓과 절연하려면 아픔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 판단은 이제 사법부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정보기관 본연의 기밀 사항에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밝힐 것은 모두 드러내놓고 사법부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총풍 사건은 더욱 한심한 선거 개입 공작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측에서 북측을 방문한 대표단 일행이 만찬 이후 북측 인사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김정일이 이런 말을 했다.
“남측 국정원장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이고, 제일 형편없는 사람은 ×××라고 생각합니다. ×××는 우리한테 선거 때 총 쏴달라고 요청했으니 한심한 사람 아닙니까?”
나는 이 말을 대표단으로부터 전해 듣고 섬뜩했다. 그는 우리 내부의 약점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에 외적에게 공포를 쏘고 연극을 해달라고 한 짓도 알고 있다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이야말로 중대한 이적 행위였다. --- p. 446~447
김우중 회장에게 친구로서 한 충고 __
김우중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점점 심각해졌다. 나는 참다못해 나의 직분에 맞지 않지만 친구로서 그에게 충고했다.
“세계경영을 하려면 집안 단속부터 해야 하지 않나? 지금 대우는 구조조정과는 역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네. 내실부터 튼실하게 챙기고 자기가 서 있는 기반을 튼튼히 해야 세계경영도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자네에게 상식적으로 말하는 것일세.”
그는 펄쩍 뛰면서 나의 말을 반박했다.
“구조조정을 누가 소홀히 하겠나? 그런데 누가 사 가야지, 내놔도 사갈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싸게 팔면 국가에도 이익이 될 게 없지 않나? 이게 다 IMF 뒤에 숨은 외국자본의 장난이야!”
“우량 기업부터 내놔야지, 적자 기업 내놓고 사라면 누가 사겠는가?”
“나도 자동차 사업에 전념하려는 생각이라 다른 기업들은 처분하고 싶네. 값만 잘 받는다면 당장에라도 처분하겠네.” ……
“김 회장! 나는 자네가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를 치르고 정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그런 은혜를 입었다고 김 대통령이 반대급부로 무엇을 해주리라 기대하진 말게. 과거 박정희나 전두환은 대우가 삐걱하면 경제 부처장들 불러서 ‘대우가 망하면 한국 경제가 흔들려. 그러니 봐줘야 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었네. 그러나 김대중도 그런 말 해주리라 기대하지 말게. 그분은 그럴 만한 배포도 없고, 그런 식의 기업 살리기가 잘못되었다고 지금까지 비판해온 사람이네.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자기가 한 말을 뒤집겠나? 김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우중도 잘되고 대우도 잘되기를 바라겠지만, 어디까지나 자구 노력을 잘하라는 것이지, 그가 대통령 권한으로 보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그 후 김우중의 행동을 보면 내 말을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대통령 면담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대통령을 만나면 수출을 위해 금융을 풀어야 한다는 요청을 되풀이했다. 실로 3공, 5공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대우라는 거대 기업군은 그의 원맨쇼에 달려 있었다. --- p. 484~485
국가정보원 불법 감청 __
미국의 백악관이나 의회는 모두 통신정보(SIG-INT)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라고 사생활 침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문제를 우리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따지고 검토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다. 그러나 그들은 ‘사생활 보호’와 ‘국가 안전보장’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에 대해서도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보 상황이 긴박할 때는 사생활이 어느 정도 침해되더라도 이를 희생해 안보를 지키고자 노력했고, 또 인권이 지나치게 침해되면 안보 상황과 균형을 맞추고자 의회가 견제해왔다.
하지만 우리 국회는 어떠한가? 현재 이동통신에 대한 감청이 공백 상태인 줄 알면서도 이를 개선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 작업을 부지하세월로 미루고 있다. 2015년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해킹 문제도 사실 국회가 합법 감청을 허용하는 입법을 해줌으로써 불법 논란을 정리해야 할 문제다. 즉, 국회가 통신기술의 발전 추세에 맞추어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해 합법적인 감청을 허용해주고, 그런 연후에 불법 감청에 대해 철퇴를 가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불비한 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정보기관은 법이 개정될 때까지 놀고먹든가, 아니면 부득이 불법이라도 감행해 국가 안보를 지키려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국회에서 이렇게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국회의 무능 이전에 국정원 자체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국민이 국정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 p. 531~532
왜 국정원장을 그만두었나 __
내가 그만둘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게 된 셋째 계기는 김대중 대통령이 원하는 국정원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회의가 든 데 있었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나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걸핏하면 “국민이 중앙정보부를 무서워해야 한다”라고 요구하는 데 저항감을 가졌었다. 이 말이 결국 모든 정치 사건의 주범이었다. ‘남산’에서 왔다고 하면 울던 애도 울음을 그치고 산천초목이 떤다고 하지 않았나? 정치인도 ‘남산’이라면 오금을 펴지 못했고, 기업인, 은행장, 공무원 모두가 무서워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무섭기는 무서웠다. 1971년 10·2 항명파동 때 여당의 중진들이 짹소리도 못 하고 줄줄이 끌려와 고문당하고, 수염 뽑히고, 의원직 사퇴서를 썼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 것도 박종규 경호실장이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도대체 정보부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김대중이 동경에서 반한 활동을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한마디 하자 이후락이 ‘각하의 방침’이라고 생각해 무리한 줄 알면서도 백주에 도쿄에서 납치 사건을 강행했던 것이다. ……
1999년 4월 16일, 청와대에 가서 김 대통령에게 주례보고를 했다. 보고에는 총풍 사건과 관련된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김 대통령은 몹시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 “이게 언제 일어난 사건인데 아직 1심 재판도 끝나지 않고 질질 끌고 가는 거요?”라고 힐문했다. 그리고 이어 “요새 국정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래요”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이 말에 질겁했다. ‘아! 이건 김대중 대통령이 할 말이 아닌데!’ 그 순간 나는 이제 이 직책에서 떠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 뒤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까지의 국정원 개혁 방향은 분명히 ‘안으로는 국민에게 사랑받고 밖으로는 가상 적이나 다른 나라에 물샐틈없는 정보활동으로 무서우면서도 존경받는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폭압 기관이 아니라 외경받는 기관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김 대통령이 ‘국정원을 무서워하는…’ 운운한 것을 보면 혹시 예전과 같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혹시 그간 나의 활동에 대해 너무 정치적이라는 오해가 쌓인 결과인가? --- p. 550~552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__
오는 2019년은 3·1 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앞서 언급한 우당 이회영의 생각과 삶은 독립운동의 자장 속에 있었고, 그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바로 3·1 혁명과 임시정부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2019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요즘 심사숙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왕조(王朝)의 백성이 민국(民國)의 국민으로 스스로 탈바꿈한 이 혁명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 이후 100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를 곰곰이 되새겨보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1945년 이후 70년의 역사가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 이후 100년의 궤적 속에서 돌이켜보는 일이다.
이 100년의 역사를 과연 무엇으로 기록하고 기념할 것이며, 나아가 거기서 무슨 비전을 찾아낼 것인가? 내가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그 100년의 이야기들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용해해 담아내려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 p. 561~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