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용정(龍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명동에서 테러 사건을 일으켜 치안이 불안해지자 윤동주 일가와 친척들이 용정으로 이사해 와서 살게 되었다. 용정은 명동에서 20리 서쪽에 있었다.
1934년 겨울에 놀라운 소식이 이들에게 전해진다. 은진중학교 3학년에 때였다.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짧은 소설(콩트)을 응모하여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송몽규의 당선 소식에 크게 자극을 받았고,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세 편의 시를 완성한다. 그가 발표한 최초의 성인시(동시와 반대되는 의미)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였다. 동주는 시를 쓰면 꼭 끄트머리에 쓴 날짜를 써 놓는 습관이 있었는데 같은 날 3편의 시를 썼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과 자극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일주일 뒤인 1935년 1월 1일자에 콩트 ?숟가락?(신문에 발표될 때의 제목은 ‘술가락’)이 필명 ‘송한범’이라는 이름으로 실리자 동주는 결심을 더욱 굳게 했을 것이다.
‘몽규 형은 역시 글을 잘 써. 중학교 학생인데 벌써 소설가가 되었구나. 그럼 나는 시를 써 시인이 되어야지.’
-20~21쪽
동주의 시에는 ‘순(順)’ ‘순이(順伊)’라는 여성의 이름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 동주와 사랑을 나눈 여성이 있었을까? 이는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순이가 누굴까? 자신이 짝사랑했던 이의 이름을 스스로 친구들 앞에서 밝힐 수 없어서 이렇게 남몰래 애칭을 하나 지어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리워하면서 시를 쓴 것이 아닐까?
강처중은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생이었다고 앞에서 말했었다. 광복 이후에 그는 유고가 된 노트에 실려 있는 시와 그때까지 모은 동주의 시를 정음사에 들고 가서 시집을 내는 일에 앞장섰는데, 그가 쓴 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77쪽
윤동주의 생애를 보면 공부에만 몰두한 학구파가 아니었고, 성적이 특별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격도 차분하고 조용하였고 시 쓰기를 즐긴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한편 사촌 송몽규는 일본 국내의 제국대학의 하나인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시험을 쳐 합격을 했다. 같이 시험을 친 윤동주는 떨어져서 후기라고 할 수 있는 도쿄의 릿쿄대학에 합격했다.
일본의 국립대학인 제국대학은 그야말로 천황이 다스리는 제국(帝國)의 국민을 가르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국가기관이다. 1886년에 수도 도쿄에 도쿄제국대학이 세워졌고 1897년 교토에 교토제국대학이 세워졌다. 20세기에 들어와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게이조(서울의 경성제국대학), 다이호쿠(타이페이의 대만제국대학), 오사카, 나고야 순으로 세워진 이 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천재로 인정을 받았고 졸업생은 각 분야에서 국가 경영의 지도자가 되었다.
릿쿄대학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외로웠다. 송몽규를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 몇 사람이 교토에서 학교에 다니는데 자기는 달랑 혼자 도쿄의 릿쿄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외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42년 4월 2일부터 다녔는데 첫 학기 수강 결과 성적이 영문학연습은 85점, 동양철학사는 80점이 나왔다. 그다지 신통치 않은 성적이었다.
외로움은 편지를 쓰게 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 강처중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시도 5편 함께 넣어 보냈다.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봄?을 강처중은 잘 간직한다.
-107~108쪽
나는 이 가운데 ‘기독교적 원죄 의식이 가져다준 겸손한 신앙인으로서의 부끄러움’에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그의 위로 올라가서 자기의 자율을 헛되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까닭에 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담과 이브, 카인, 라멕, 그리고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자들이 모두 이 예에 속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셨나이다’라는 시편 51장 5절은 시편 기자가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의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리라’(누가복음 11장 13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신약에서도 인간은 분명 죄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같이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육을 받은 식민치하의 젊은 지식인 윤동주는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뼈아픈 죄의식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적 삶이라는 결단에까지 이른다. 윤동주가 쓴 종교시가 정지용의 것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윤동주의 죄의식은 크게 두 가지에서 연유한다. 첫째, 어릴 때부터 받은 종교교육의 영향에서 온 원죄 의식. 이때의 원죄란 아담과 이브에서 연유된 죄의 의미보다는 ‘신 앞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죄의식, 즉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은 데서 오는 자괴감으로 보는 것이 좋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