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석이 이미 죽어버린 물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사라져버린 세계, 인지할 수 없지만 동시에 너무나 친숙한 세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타임캡슐이다. 이 화석들은 사실과 숫자 이상의 뭔가를, 현생 동물의 전형적인 행동에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진화적 기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본문에 펼쳐진 이야기와 삽화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한순간을 담아낸 스냅샷을 볼 수 있고, 화석 속 동물들이 한때 여러분과 나처럼 실제로 살아 숨쉬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그들, 그리고 시간 속에 갇힌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 pp.12~13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 다시 말해 ‘성교’라고 합의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약 3억 8500만 전에 살았던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미크로브라키우스 디키Microbrachius dicki의 화석이다. 다만 여기서 짚어두자면, ’디키’라는 이름은 첫 번째 화석 발견자인 로버트 딕Robert Dick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저 재미있고 또 심오한(?) 우연일 뿐이다(‘딕’은 페니스의 속어다-옮긴이).
--- p.26
1846년, 영국에서 가장 많은 화석 표본을 가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수집가 조지프 채닝 피어스가 서머셋주의 작은 마을에서 수집한 익티오사우루스의 화석을 연구하다가 중요한 발견을 해냈다. 나는 연구의 일환으로 지금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화석을 직접 살펴보는 특권을 누렸다. 피어스는 골반에 가까운 흉곽 끝부분에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작은 뼈대를 찾아냈다. 뼈대의 위치는 위장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화석으로 남은 동물의 마지막 식사일 수가 없었다. 이는 익티오사우루스가 새끼를 낳았다는 핵심적인 증거 중 하나다. 만약 이 추론이 맞다면, 이 표본은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임신한 파충류 화석이다.
--- pp.36~37
마이아케투스의 한 표본은 성체 갈비뼈 사이에 꽤나 커다란 태아 한 마리의 섬세한 두개골과 뼈대 일부가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마이아케투스Maiacetus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엄마Maia’와 ‘고래ketos’를 합친 ‘엄마고래’라는 뜻이다. 화석으로 발견된 이 종이 임신 중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표본은 초기의 걷는 고래 중 유일하게 임신 상태로 발견된 화석이다. 뱃속에 태아가 한 마리만 있는 것은 한 번에 한 마리씩 낳는 현생 고래와 같다. 하지만 새끼가 다리부터 태어나는 현생 고래와 달리, 마이아케투스 태아는 육상 포유류의 전형적인 방식인 머리부터 태어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초기의 고래들이 육지에서 새끼를 낳았다는 증거다.
--- p.52
이 표본은 척추동물의 섹스 행위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담긴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화석기록이다. 다시 말해 두 동물은 실제로 교미를 하던 중의 자세 그대로 발견되었다. 한 쌍의 동물이 교미를 하던 중에 함께 죽어 온전한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화석으로 남을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를 고려하면, 정말 대단한 발견이다.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하니까 말이다.
--- p.60
알을 훔치는 악당에서 알을 돌보는 부모로, 오비랍토르의 행동에 대한 해석의 이런 변화는 이 진기한 이야기의 전모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선사시대 동물들의 행동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추가 표본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일깨워준다. 이 공룡 어미들의 조류와 비슷한 알 품기는 공룡과 현생 조류 사이의 행동학적 연결고리를 제시함과 동시에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행위가 아주 먼 옛날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 p.78
피미엔토 팀이 연구결과를 발표한 지 10년이 지난 2020년, 또다른 연구팀이 스페인 북동부 타라고나 지역에서 새로이 발견된 메갈로돈 어린이집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보고했다. 이 팀 역시 메갈로돈 이빨이 발견된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화석산지와 지층 여러 곳을 재조사했고, 신생아부터 청소년까지의 개체 비율이 높은 정도를 바탕으로 (가툰과 타라고나에 더해) 보육공간으로 추정되는 곳 세 군데를 추가했다. 두 곳은 미국 메릴랜드와 플로리다에 있고 나머지 한 곳은 파나마에 있다. 다섯 산지의 연대는 모두 1550만 년 전에서 470만 년 전 사이다.
--- pp.93~96
화석에서 이타적 행위의 뚜렷한 증거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같은 종의 크고 작은 개체들이 서로 뒤엉킨 채 한꺼번에 발견되더라도, 그저 단순히 사체가 쌓인 건지 다른 행위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증거 몇 가지가 함께 남아야 하고 화석 또한 확실한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아주 잘 보존되어야 한다. 이런 놀라운 골층이 중국 랴오닝성의 약 1억 2500만 년 전 백악기 암석에서 발견되었다. 화산쇄설물 또는 라하르(화산 분화구에서 나온 화산재와 진흙, 뜨거운 지하수가 섞여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옮긴이)에 공룡 무리가 산 채로 한꺼번에 묻혀 이례적으로 보존된 화석이다.
--- p.97
공룡 발자국은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흔적과 함께 발견되는 일이 거의 없다. 이 표본의 경우, 수각류는 웅크리고 앉아 새처럼 편안한 자세로 쉬었을 뿐만 아니라 엉덩이 주변의 두꺼운 피부(둔부경부, 또는 시팅패드)와 꼬리의 흔적, 심지어 앞발자국까지 남겼다. 특히 앞발자국은 〈쥬라기 공원〉의 수각류들이 보여준 악명 높은 ‘토끼손’, 다시 말해 손바닥을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가 아니라 (박수치는 것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수각류의 구조와 해부학적 위치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 p.148
이동궤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도 그 궤적의 주인공과 함께 고스란히 보존된 표본은 고대의 한 동물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조합이다. 이 표본은, 비록 경험 부족 탓에 결국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 어린 투구게가 석호의 치명적인 위험을 짧은 시간이나마 견뎌내는 놀라운 장면을 담고 있다.
--- p.152
용각류는 일반적으로 무서운 포식자가 아니라 식물을 뜯어먹는 거대 공룡으로 여겨진다. 이 초식동물들은 엄청난 양의 잎과 줄기를 씹어먹으며 (대체로) 커다란 몸을 지탱해야 했고, 그 거대한 덩치야말로 그들을 지켜주는 주요한 방어수단이었다. 용각류는 그 몸집으로 자신을 지켰을 테고, 아마도 그 과정에서 많은 포식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용각류에게 되치기당해 죽고 만 희생자의 화석이 등장해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몰라도, 지금으로선 그저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만. 그런데 2010년, 용각류 일부가 본의 아니게 사실상의 살인자였음을 보여주는 특이한 화석이 발견되었다.
--- p.158
결과는 놀라웠다. 굴 안에는 트리낙소돈의 완전한 뼈대가 자신과 크기가 비슷한 양서류 브루미스테가 푸테릴리Broomistega putterilli의 어린 개체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브루미스테가 역시 완벽히 보존되어, 얼룩덜룩한 피부까지 남아 있을 정도다. 트리낙소돈은 머리를 굴 끝을 밀 듯이 왼쪽으로 어색하게 비튼 채 엎드려 있고, 브루미스테가는 등을 대고 누워 배를 드러낸 채 트리낙소돈에 기대어 있다. 전혀 다른 두 동물의 이 당혹스러운 조합을 보면 둘이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 pp.169~170
오릭토드로메우스는 최초로 발견된 굴 파는 공룡이다. 이 친구는 몇몇 공룡들이 땅을 파 포식자와 악천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굴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굴 안에서 오랜 기간 새끼를 돌보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준다. 굴과 뼈대가 함께 발견된 이 표본들은 공룡의 습성을 그대로 담은 가장 절묘한 화석기록 중 하나다.
--- p.181
과학계의 주목을 모은 최초의 땅늘보이자 북아메리카에서 나온 첫 표본 중 하나에는 재미있는 역사가 얽혀 있다. 바로 웨스트버지니아의 어느 동굴 안에서 발견된 뼈대 조각을 연구한 사람이 다름아닌 미국의 세 번째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 제퍼슨은 뼈대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사자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1797년에 자신의 발견을 미국철학협회 회원들과 공유했다. 1825년, 이 종은 제퍼슨의 이름을 따서 메갈로닉스 예페르소니Megalonyx jeffersonii라고 명명되었다.
--- p.182
한 동물이 화석으로 남을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를 고려하면,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우고 있던 두 공룡의 크고 완전한 뼈대는 고생물학 역사상 가장 절묘하고도 가장 믿을 수 없는 발견 가운데 하나다. 아마도 어떤 행동을 하는 순간이 포착된 화석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 위험한 한 쌍의 한쪽은 트리케라톱스의 멧돼지만 한 초식성 친척인 프로토케라톱스 안드레우시Protoceratops andrewsi다. 친척과 달리, 프로토케라톱스는 몸집에 더해 머리 볏도 상대적으로 작고 트리케라톱스를 상징하는 큰 이마 뿔도 없다. 다른 한 마리는 포식자인 벨로키랍토르 몽골리엔시스Velociraptor mongoliensis다. 벨로키랍토르는 따로 소개할 것도 없는 이름이다. 물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쥬라기 공원〉에서 그려졌던 것과 달리 벨로키랍토르는 키가 칠면조 정도였고, 몸이 훨씬 큰 프로토케라톱스가 몸무게도 3~4배는 나갔을 것이다.
--- p.203
흉곽 사이에, 머리 방향이 크시팍티누스와 정반대인 또다른 물고기가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였을까? 절대로 아니다. 이 두 번째 물고기는 약 1.8미터로 꽤 컸고, 길리쿠스 아르쿠아투스Gillicus arcuatus라는 완전히 다른 종이었다. 스턴버그는 크시팍티누스와 그의 마지막 식사라는 궁극의 어획물, 다시 말해 포식자와 피식자의 직접적인 증거를 낚아올렸던 것이다. 이 ‘물고기 안의 물고기’는 스턴버그의 ‘있을 수 없는 화석impossible fossil’이라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알아보기 쉽고 가장 많이 촬영된 화석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표본은 지금 스턴버그 자연사박물관의 명예로운 자리에 전시되어 있다.
--- p.218
보로파구스와 그 패거리들은 멸종 하이에나 및 현생 하이에나와 비슷한, 고도로 전문적인 뼈를 으스러뜨리는 행동을 독립적으로 진화시켰다. 여태껏 이 갯과 동물들의 소화기관에서 뼈가 발견된 적은 없지만, 화석으로 남은 그들의 똥은 이 최상위 포식자들이 먹이의 뼈를 먹어치우고 이제는 더이상 북아메리카에 존재하지 않는 생태학적 틈새를 채웠다는 오랜 가설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 pp.226~227
뱀은 다음 식사를 즐기는 대신, 빠르게 흘러내려서 순식간에 모든 걸 깊이 묻어버리는 진흙사태에 휩쓸려 죽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기 공룡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이 조합은 뱀이 한땐 공룡을 잡아먹고, 지구상에서 걸었던 가장 큰 동물의 새끼를 포식飽食했다는 증거다. 이 가장 이례적인 화석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다.
---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