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이나 꿈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시작한 직장 생활이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졸업을 했으니, 나잇값을 하려니, 생활을 하려니 찾은 일자리였다. 직장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가 없었다. 이런 게 사회 생활이라며 부딪쳐오는 갖가지 관행들이 싫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천만 원만 모으면 사표를 던지기로.
내 결심은 친구들의 간절한 충고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예상보다 강한 부모님의 반대 앞에서도 변함없었다. 그러나 사직서를 써 들고 출근한 날, 나는 하루 종일 사직서를 손에 쥐고 폈다 접었다를 반복하다가 고스란히 집으로 들고 퇴근했다. 나는 그만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 다시는 ‘그만두겠다’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여행을 만났다.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오히려 삶에 정착해 갔다. 직장이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고, 힘들어도 참아내면서 땀 흘려 내일을 준비하는 재미를 느껴갔다. 장애물들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금씩 변해갔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세상도 내게로 조금씩 돌아서는 것 같기도 했다.
_ 11p. '프롤로그 : 세계일주, 나는 직장 다니면서 할 거야!‘ 중에서
출발 이틀 전 홈페이지를 통해 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출발 일정과 첫날 숙소가 같으니 모스크바까지 동행하면 어떨까요?’
일행이 있으면 비행기에서도 심심하지 않고 숙소까지 가는 지하철에서도 든든할 것 같아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마흔 살가량 되어 보이는 노숙한 외모를 가진 서른두 살의 B군은 그렇게 만났다. 출장을 빙자하여 호텔에 투숙하는 여행만 두어 번 해봤다는 말에 배낭여행에 적응할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됐다. 에라, 모르겠다, 잘 적응하겠지 뭐.
하지만 B군은 기대 이상이었다.
“(B군 :) 혼자 쓰는 도미토리 주세요. (*도미토리는 보통 4인 이상이 함께 사용하는 다인실을 말한다)”
_ p28. ‘어쩌구스키 저쩌구스키(러시아) : 엉뚱한 동행’ 중에서
“이거를 잘 섞어서 배와 등에 바르세요. 그리고 옷을 많이 겹쳐 입고 땀을 내봐요.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최고예요.”
미얀마 사람에게만 신통방통한 약이었는지, 토종 한국인인 내게는 전혀 효험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파김치가 되어 침대 위를 기어다녀야 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방을 나서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나를 식당으로 끌고 간다. 냄비 뚜껑을 척 열어보이는데 한 솥 가득 흰 쌀죽. 한국에서는 이럴 때 흰 쌀죽을 먹는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했던 걸까.
_ p82. ‘꽃을 든 수도승(미얀마) : 엄마 마음’ 중에서
열 명 남짓한 가수와 기타리스트, 무희가 등장했지만 유독 내 눈길을 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 번도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시종일관 뒤에서 박수와 노래로 무희의 춤을 받쳐주던 남자. 나이가 쉰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얼굴 주름에,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 한 발을 구르며 박수를 칠 때의 강렬한 몸짓에 집시의 고단한 생이 스쳤다. 평생 무희 뒤에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을 한 남자의 인생이 보였다.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한 가지에 자기 인생을 기꺼이 다 바친 사람은 아름답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구별할 수 있는 깊은 울림이 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다 바칠 만큼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그것이 플라멩코든 사랑이든 성공이든……. 나는 과연 무엇에 미쳐 살 수 있을까……. 그와 계속 눈을 맞추며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_ 136p. ‘춤추고 싶다(스페인) : 플라멩코’ 중에서
국제선 공항으로 향하는 중에 한 독일 아저씨가 ‘도메스틱(국내선)’에 들러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운전사는 “노 도메스틱, 온리 인터내서널”이란다. 두 군데 모두 가는 차인데 장난을 치는 것이다. 독일 아저씨는 기겁을 해서 “도메스티-익!”이라며 악을 쓰고 운전사는 계속 “노, 노!”하며 실실 웃는다. ‘저러다가 혈압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싶어 불안해지는데, 운전사는 천연덕스럽게 박지성이니 한국축구니 잡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독일 아저씨가 뒤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에 버스는 국내선 청사 앞에 정차했고, 기사는 씩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었다니까, 농담!”
_ 193p. ‘맞선(터키) : 터키식 농담’ 중에서
“까밀라! 까밀라! (*까밀라는 이집트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서울로 치자면 광화문 한복판에서 젊은 청년이 “이쁜아! 이쁜아!” 하고 부르고 있는 모양새 아닌가. 진짜로 남자친구의 배웅이라도 받는 듯 재미있어서, 뒤돌아 손 한 번 휘휘 저어주고 돌아서다가 그만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아직 어색한 내 이름이 재미있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무릎을 깨먹고도 연신 히죽거리기만 하는데, 금세 여기저기서 나타난 사람들이 나를 둘러쌌다.
“까밀라, 괜찮아요?”
아픈 것도 잊고 그들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까밀라, 나는 카이로의 스타였다!
_ 224p. ‘내 이름은 까밀라(이집트) : 내 이름은 까밀라’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