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나는 길을 갈 때면 벽에 한쪽 어깨를 가까이 붙이고 걷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고, 남의 이목을 끌거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나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 자신조차 믿기 어려운 일들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p.12
‘하늘이 무너져도 상대방이 솟아날 수 있는 구멍은 남겨 두라’는 아버지의 인생철학을 들은 그날 이후로는 지나치게 남을 몰아세우기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p.32
내 몸에 흐르는 피는 대만 원주민인 할머니와 하카인 아버지, 그리고 허뤄인 어머니 모두에게서 온 것이다. 이렇게 다채롭고 풍요로운 대만의 저력을 품고 태어난 것이 나로서는 참 벅찬 행운이다.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책임감 있게 이 땅을 일구며 살았던 조상들. 그들이 남긴 정신은 마치 나의 서툰 허뤄어처럼, 애써 부정하려 해도 우리 안에 흐르고 있으리라.---p.48
그렇게도 책이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사람들은 왜 저마다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생각을 할까? 돌이켜 보면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환점들을 맞이하고,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직책을 맡게 되었던 것도 모두 이 왕성한 호기심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p.52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 나는 먼저 충분히 뜯어보고 이해한 후에야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도, 일단 내 머릿속에 참고할 만한 전례가 있는지 꼼꼼히 찾아보고 여의치 않다면 컴퓨터에 새로운 파일을 만들듯 저장해 둔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는 사람이라서, 무엇을 배우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도 선생님의 사고방식이 나와 맞지 않으면 그 선생님이 전달해 주는 지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내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교의 교육 방식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나의 방법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새로운 정보를 인지하면 일단 나의 사고 체계 속에서 찬찬히 연구해 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혼란스러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일정한 질서를 발견해 내고, 정보를 쪼개고 다시 종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어떤 지식이든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나만의 정보 처리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체득할 수 있었다. 나는 다른 누군가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닌, 나 자신으로 남고 싶었던 것 같다.---pp.55~56
나는 사회 각층의 목소리를 들었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 속에는 기업 간의 이익 충돌부터 다수와 개인 간의 충돌, 그리고 경제학자 간의 의견 충돌까지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선입견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을 우선시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익 간의 충돌 안에서 타협점을 찾아내야 했다. 정상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p.162
리더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는 어떻게 하면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통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회의의 준비에서 개최에 이르기까지 나는 주최자로서 온 힘을 다했다. 토의가 핵심에서 벗어나거나 갈등이 심화될 때 이를 조율하는 것 또한 나의 임무였다. 사람들이 나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하든, 내 목표는 아주 단순했다. 그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청사진을 그리고, 대만이 새로운 원동력을 통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pp.181~182
민주 사회에서 시위를 통해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시위에 가담하는 민중들은 대부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시한다. 그렇다면 정부도 시위에 참가한 국민을 최대한 보호하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p.221
불확실성 관리는 현대 경영학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이는 일종의 위험관리로 고도의 전문 지식을 요하는 분야인 탓에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불확실성 관리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종종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결정을 내리곤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의 시각에서 보면, 불확실한 요소가 산재한데도 무작정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단이 아니라 차라리 도박에 가깝다. 내가 가진 모든 전문 지식을 동원해 불확실한 요소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만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정밀한 분석이야말로 책임감 있는 지도자가 꼭 거쳐야 할 과정이다.---p.255
지도자는 위기에 맞서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사회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현재 상황과 미래의 방향을 파악하고 이를 공유한다. 그래서 지도자가 “이쪽으로 갑시다!”라고 외치면 그 근거를 충분히 따져서 이해하고, 만약 지도자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민주사회의 모습이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한데 모여 살아도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덜 성숙한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현실에 대한 공론과 이해가 형성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저마다 의견이 다르고 서로 목소리를 높인다.---p.256
지도자는 모든 일을 혼자서 일일이 챙길 수 없으므로 남에게 책임을 나누어 줄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으면서 나는 일단 큰 방향이 정해지면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구성원들이 한 뼘 더 성장할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위험 요소가 커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결정적인 때가 오면 지도자는 마지막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파급력이 큰 중요한 결정은 지도자 스스로 내려야 한다. 결정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결국 자신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도자는 위기 상황을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책임을 질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종종 지도자의 역할이 부모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부모가 든든한 책임자 역할을 해야 자식이 탈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지도자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그가 이끄는 대열이 발전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품에서 놓아주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지켜본다. 지도자도 그래야만 한다.---p.258
지도자는 남들보다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모두가 당면한 문제에 고심하고 있을 때, 지도자는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다보면 정말 중요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잠재적으로 더 많은 문제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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