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으면서 다음 잔을 마셨다. 알싸한 맛이 톡톡 터지는 위스키였다. 하지만 그냥 맵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아릿한 자극 속에 앵두알처럼 터지는 상큼한 향이 화사하게 입안을 환기시켰고 그 밑에서 치고 들어오는 건 달고나처럼 눌어붙은 진한 설탕 맛이었다. 나무 향은 은은하면서도 결이 고왔다.”
--- p.89
“사랑은 다 똑 같은 사랑이지. 다들 사랑할 땐 영원할 것 같지만, 알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사랑할 수 있는 때도 사랑할 수 있는 대상도 늘 있는 게 아닌 걸. 사랑은 끝나면, 그냥 끝나. 뭔가가 죽어 버리는 것처럼. 다시 한다고 해도 예전같이, 그 열기와 진동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 깨진 그릇 이어 붙인 것처럼 자국이 늘 남고 그건 사라지지 않아. 못 본 척할 수 있을 뿐, 언젠가 다시 충격을 받으면 균열은 늘 거기에서 시작해.”
--- p.122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 p.128
“보통 그리움이나 외로움, 우울함 같은 걸로 번역하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다 갈망 때문이잖아. 목마른 사람처럼 원하고 바라는 거. 그걸 하지 않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항구에서 손 흔들며 웃는 것 같은 마지막 부분도 나한텐 그런 느낌이고.”
--- p.145
“나는 결혼을 믿지 않았다. 내가 겪은 것으로서도, 주변에서 보는 것으로서도, 또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서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한 사람들조차 마모당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결국 헤어짐으로 끝난다. 게다가 시작부터 원거리 연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경험이 충분했다.”
--- p.185
“지금은, 화분 같다는 생각을 해. 키우고 기르는 거, 상처도 입히고 잘못도 하지만 계속, 같이 가는 거지.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 다 실수하고 잘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뭘 몰라서, 서툴어서. 우리도 화분 속 화초처럼 아직 크는 중이니까.”
--- p.265
“자꾸 기대하게 되니까. 특별해서 사랑하는 것도, 사랑한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데 자꾸 내 기대를 그 특별함에 걸게 되니까. 나는 해원도 나도 서로 다른 한 사람일 뿐이라고, 제각각 다른 화분들처럼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어. 누군가를 특별하게 해 주는 사랑마저도 실은 누구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지는 않다고. 사랑도 이 관계도, 이런 시간도 단지 내가 원한 것뿐이라고,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고 그렇게.”
--- p.272
“아름다운 건 살아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만들지.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만든다는 건 사라진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해. 거기에 만든다는 것의 아름다움이 있는 거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만든다는 것만큼 살아 있다는 걸, 사랑한다는 걸 증거하는 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무용하다고,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의 쓸모와 무용함을 일깨워 주니까. 우린 아름다운 걸 좋아해. 아름다운 걸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름다운 걸 만들 수밖에 없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능력이야.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오직 신만을 닮은 우리의 능력.”
---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