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발의 대포만이 남아 있었다. 뮬란은 숨을 들이마시고 두 발을 눈 속에 파묻은 채 눈앞에 보이는 산등성이에 훈족의 움직임이 있는지 살폈다. 몇 분 전까지 머리 위로 적군의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던 산등성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잠잠했고 너무나도 고요했다. 하지만 이 고요는 훈족이 후퇴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곁에 있던 병사들, 야오, 링, 치엔포, 심지어 그녀의 용 수호신인 무슈까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두려움으로 창자가 뒤틀렸다. 산등성이 위로 검은 말에 올라앉은 위풍당당한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샨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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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나는 가망이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느낄 수 있어.”
샹이 물병을 내려놓자 그의 손이 눈 위로 툭 떨어졌다.
“나를 여기 두고 떠나라.”
“대장을 두고 가지 않겠습니다.”
뮬란이 단호하게 말했다. 샹이 기침을 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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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내 모습을 보이라고? 바로 네 앞에 서 있는데. 고개를 들어봐라.”
뮬란이 위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거대한 돌사자였다! 칸만큼 키가 크고 천막만큼 몸집이 컸다. 둥근 두 눈은 오렌지색이었고, 목에는 우아한 옥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가 앞발을 눈밭으로 뻗으며 단도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뮬란은 검을 휘두르면서 다른 병사들을 깨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돌사자가 달빛 속으로 거대한 발을 내밀었다.
“너… 정체가 뭐지?”
“나는 쉬쉬다.”
돌사자가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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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배신감이 그의 얼굴에 퍼졌다. 따뜻했던 갈색 눈동자가 식었고,목 근육이 뻣뻣해졌으며, 입술은 한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샹이 이를 악물었다.
“여자냐고요?”
뮬란이 그를 대신해서 말했다.
“싸울 수 있는 여자들도 있다고 했잖아요.”
샹은 웃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희미한 푸른빛을 씻겨낸 것처럼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 말을 들어주세요….”
--- p.234
“꽃, 역경을 이겨내고 피어난 그 꽃이 가장 귀하고 아름답다.”
뮬란은 칼날에 새겨진 문구를 다시 읽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관자놀이에서는 땀이 흐르고, 지친 두 팔은 뒤틀려 있었다. 그녀는 피곤하고 불안해 보였다.
‘이게 이 검이 기다려왔던 귀하고 아름다운 꽃의 모습은 아닌데.’
뮬란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너무나 세게 움켜쥔 나머지 손가락 관절들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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