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았다 해도 직면하지 않는 것, 누군가가 문제를 해결할 테고 나와 내 가정의 안위만 보장되면 괜찮다는 것, 이런 태도는 인류가 오랫동안 반복해 온 모습입니다. 21세기 영화 〈돈 룩 업〉에서도, 2,500여 년 전에 쓰인 요엘서에서도 이런 모습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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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 국가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은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시다니요! 하지만 요엘서가 포함된 소선지서의 충격적인 주제는 심판의 대상이 이스라엘 주변국만이 아니라 실은 이스라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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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니, 버젓이 다시 죄를 짓고는 또다시 ‘용서받는 은혜’를 누립니다.…이 모든 값싼 용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용서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기계적으로 또 자동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듯 하나님을 비인격화한 결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도 비인격적으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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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고, 뭔가 어려운 일을 요구하고, 불편과 불행을 주는 분으로 봅니다. 심지어 재미없는 인생을 강요하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는 것들을 요한복음에서 찾아보면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도 갖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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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나 예언자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점치는 무속인을 떠올리며 앞날을 미리 알려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구약성경의 선지자는 이와 다릅니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 p.131
과거의 경험, 과거의 공부, 과거의 훈련, 과거의 사역, 모두 그때 귀했습니다. 그때 주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과거 경험을 기억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며, 오늘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오늘입니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오늘은 어떤가요? 오늘 작동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주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오늘도 내일도, 내가 죽기 직전까지,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서까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 p.144
우리는 불의와 악이 횡행할 때, 하나님은 이미 떠나시고 안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의와 악을 보시는 순간 즉각 처단하신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즉각 심판하신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유예하고 “그들의 피 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으나” 마지막 심판과 회복의 날에 “이제는 내가 갚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p.228
한국 교회가 위기에 취약한 이유 중 하나는 낮은 공동체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조직화·제도화되어서 주일 예배와 다양한 활동에서는 강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재난이 닥치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신앙이 더 약해집니다. 그 이유는 힘겨운 세상살이도 혼자, 신앙생활도 혼자 해왔는데, 그 위에 재난이 덮치자 홀로 버티는 데 한계가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새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성을 확실히 하지 못한 채 ‘나 홀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