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일들”을 고백한다. 1)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2) 죽은 자들의 부활, 3)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음 속에 있다가 부활한 자들에 대한 심판, 4) 영원한 생명. 이 같은 명제들이 기독교 종말론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런 일들은 세계 혹은 우주의 마지막에 일어날 거라 생각되기 때문에 이 일들에 관한 종말론을 가리켜 우주적 종말론 혹은 보편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런데 세계의 마지막 일도 중요하지만, 한 인간의 마지막 일도 중요한 문제다. 그러므로 20세기 조직신학자 알트하우스(P. Althaus) 이후 기독교 종말론은 인간의 죽음 문제를 다룬다. 이를 가리켜 개인적 종말론 혹은 인격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크게 나누어 인간의 삶의 마지막 문제, 곧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인격적 종말론과, 위에 기술한 세계의 마지막 일들을 다루는 우주적 종말론으로 구성된다.
--- 「I. 종말론 서론. 1장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내 생각에 의하면 연옥설은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 16)라는 신약성서의 대전제에 모순된다. 그것은 죄와 벌, 행위와 결과의 인과율에 근거한다. 곧 죄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 하고, 죄의 행위에 상응하는 벌의 결과가 따라야 한다는 인과응보에 근거한다. 그러나 행위의 죄는 물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죄의 본성까지 헤아린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연옥의 벌을 받아도 연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일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에 대한 연옥의 벌을 받음으로써, 혹은 교회에 돈을 바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가능하다.
--- 「II. 인격적 종말론. 3장 죽음 후에 어떻게 되는가?」 중에서
중요한 문제는 종말의 징조들이 무엇인가를 찾고 종말의 시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깨어서”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다. 종말의 징조들은 객관적으로 확정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분을 믿는 믿음의 실천 속에서만 바르게 파악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한 질문과, 예수의 재림을 묘사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단 한 가지 대답은, “깨어 있으라”(막 13:37)는 명령뿐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종말을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롬 12: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 「III. 우주적 종말론 1. 1장 종말의 징조」 중에서
결론적으로 천년왕국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예수를 제의의 주님(Kultheros)이 아니라 땅의 주님으로”(Kehl 1988, 172) 인식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힌 세상 권세자들 대신에 주님께서 온 세계의 통치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다림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로마 제국에서 소외당한 힘없고 비참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천년왕국은 이 꿈과 희망을 회복할 것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암시한다.
--- 「III. 우주적 종말론 1. 3장 천년왕국의 희망」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현재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세계 구원자와의 만남인 동시에 세계 심판자와의 만남이다. 그러나 세계 심판자는 인간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이 당해야 할 심판을 자기가 당하는 대신 인간에게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 인간에 대한 심판과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는 동시에 그의 용서를 경험한다. 이 예수를 자기의 구원자로 영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생명 가운데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과 심판을 스스로 택한다. 심판은 “지금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이 예수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Walle 1986, 141).
--- 「III. 우주적 종말론 1. 5장 최후의 심판」 중에서
구약 율법의 본래 목적은 단지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새로운 생명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율법은 피조물의 생명 보호를 기본 정신으로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안식일, 안식년, 희년 계명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은 새로운 생명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요약한다. 이 계명은 땅과 땅 위의 모든 생물들에게도 해당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발견한다(땅의 안식에 대한 계명 등).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의 기본 조건은 자비와 정의에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 도처에서 우리는 자비와 정의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들이 사는 곳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강한 자와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고(시 35:10), 하소연하는 궁핍한 자와 도움받을 데 없는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해주시며, 가난에 허덕이는 자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분이다(시 72:12-14)”(곽혜원 2009, 195).
--- 「IV. 우주적 종말론 2.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 공동체」 중에서
세계의 종말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은 불의하고 타락한 모든 관계와 상황이 극복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화해하고, 하나로 통일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현 세계의 모든 부정적인 것, 불의한 것이 극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완성될 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세계 전체가 완전히 구원을 받을 때 완전해질 것이다. 총체적 의미의 영원한 생명은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이다. 그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의 완성을 향한 기다림 속에 있다. 매일의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영원한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감사하는 생명이다. 감사와 사랑과 정의가 있는 곳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 「IV. 우주적 종말론 2. 7장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영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