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은혜”를 어떤 의미로 말하고 있는가?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은혜”의 본질은 격렬한 논쟁의 주제였고, 논란 가운데 새롭게 정의되어왔다. 이 용어는 특정한 함의에 의해 그 뜻이 과도
하게 결정된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본서의 전략은 바울과 그 당시의 동료 유대인들이 각각 사용했던 관련 용어들 및 개념들을 “선물”(gift)의 범주 안에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려하는 모든 어휘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이 “선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은 몇몇 경우가 존재하고 카리스(charis)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 책의 전략은 오히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개념 영역이 선물의 인류학적 범주에 의해 가장 잘 포착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범주는 광범위하지만,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의 영역을 포함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는 어떤 혜택이나 호의 제공에 담겨 있는 선의(goodwill)를 그 특징으로 한다. 또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는 관계의 지속을 위해 자발적이고 필수적인 모종의 상호 답례를 이끌어낸다. 이에 따라 우리의 연구는 하나의 용어(특별히 “카리스”라는 단어)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연구의 초점은 단어가 아니라 개념에 맞추어져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물이라는 범주를 통해 “은혜”(카리스) 주제에 접근함으로써, 우리는 “은혜”의 특정 신학적 의미와 어느 정도 분석적 거리를 두길 희망한다. 심지어 우리가 은혜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지점에서도 말이다.
_서언 중에서
나는 이번 장에서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 첫째, 인류학 분야에서의 풍성한 “선물”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현대 서구 문화의 바깥 정황과 현대 서구 문화 이전의 정황에서 선물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또 작용했었는지에 관해 적절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둘째, 바울 시대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선물이나 자선이 지녔던 역할을 개관하는 것이다. 셋째, 서구 근대성 안에서 “선물” 개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추적함으로써, 1세기 관행 및 관련 본문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쉽게 왜곡할 수 있는 무의식적 가정들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이후 제3장에서 바울의 “은혜” 해석과 관련된 중요 계기들을 검토할 때, 바울 신학의 수용과 선물 개념의 변화, 이 둘의 상관관계를 식별하는 일은 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 이 세 가지 목적을 추구하면서 “선물” 및 “은혜”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보자. 아울러 이 책 나머지 부분에서 계속 이어질 탐구를 위해 개념적, 역사적 토대를 쌓아보자.
_제1장 “선물의 인류학과 역사” 중에서
선물 수여는 다면적 현상이므로, 선물이나 은혜는 다양한 방법으로 극대화될 수 있다. 수여자의 태도나 인격은 선물의 형태나 규모와 별개이고, 수여자와 수혜자 사이의 관계와도 별개다. 완벽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여자의 “순전한” 자선과 “이익에 대한 무관심”에 관하여, 그리고 선물의 양과 질 혹은 선물을 주는 태도나 선물의 결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복잡성으로 인해, 선물/은혜가 어떤 단일한 형태로 극대화되는 경우는 절대 없고, 한쪽 측면의 극대화가 다른 측면의 극대화를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사실 우리는 적어도 선물에 대한 여섯 가지의 공통된 극대화를 구별할 수 있다. 선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규모와 영속성 측면에서 선물의 초충만성(superabundance)을 극대화할 수 있다. 수여자와 관련하여, 우리는 수여자가 베푸는 자선의 단일성(singularity)을 극대화할 수 있다(여기서 수여자는 이 속성, 오로지 이 속성만으로 규정된다). 주는 태도와 관련하여, 선물의 우선성(priority)은 그것이 건네지는 시점이 자유와 관대함을 나타내는 지점에서 극대화될 수 있다. 수혜자의 선택과 관련하여, 완벽한 선물은 수혜자의 받을 자격과 하등의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선물은 그것의 무조건성 혹은 비상응성으로 인해 칭송 받는다. 선물의 효과 측면에서, 우리는 선물의 유효성(efficacy), 곧 선물이 그것의 목적을 완벽히 성취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데리다가 제시하는 것처럼 선물은 비순환성(non-circularity)을 띨 때 그리고 보상이나 답례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가장 “순수한” 선물로 간주될 수 있다.
_제2장 “‘선물 혹은 은혜’ 개념의 극대화” 중에서
이번 장에서 우리는 은혜를 “올바르게” 해석하려고 애썼던 바울 수용사의 여러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바울 본문이 지닌 논쟁적이고 대립적인 수사학으로 인해, 은혜 주제는 거의 2천년 이상의 해석을 거쳐 오면서 매우 다양한 방식이기는 하나 자주 “극대화”(극단으로 치닫음) 되어왔다. 아래의 예들은 불가피하게 선별적이다. 하지만 2세기의 마르키온(Marcion)에서 20세기 마틴(Martyn)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논의되는 각각의 저술가들이 가진 중요 의미와 영향력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째, 선별된 바울 해석자들이 바울의 은혜 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어떤 차원 안에서 이 주제를 극대화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해석을 역사적, 사회적, 이념적 정황 내에 위치시킴으로써, 왜 그들이 은혜와 관련하여 이러한 특정 극대화들을 채택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많은 요점이 단지 개괄적 수준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은혜의 다양한 극대화들이 바울 수용사에서 어떻게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는지, 왜 은혜의 극대화들이 그토록 다양하고 서로 대립적인지, 그리고 은혜의 극대화들이 어떻게 그것들 자체의 역사적 국면과 신학적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지, 바로 이러한 내용들을 추적해 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_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중에서
유대교의 다섯 문헌/저자들(5-9장)에 관해 분석한 결과를 따르고 여섯 가지 은혜의 “속성”으로 이루어진 분석 구조(2장)를 사용하게 될 때, 우리는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샌더스가 은혜의 우선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타당하지만 은혜의 우선성은 여섯 가지 가능한 은혜의 극대화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이 극대화가 다른 극대화들을 전혀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혜가 선행하는 것이라 해도, 이것이 은혜가 반드시 비상응적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은혜의 우선성(곧 언약적 토대)에 기초를 두고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공통 패턴”을 규명하는 일은 곧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일치성을 보여주는 일차원적 분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러한 일치성은 다른 모든 차이를 무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은혜가 모든 곳에 있다는 샌더스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 말은 은혜가 어디에서나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혜의 의미를 탐구하고 은혜의 다양한 속성들을 분해해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펴본 유대교 문헌들이 (주로) 은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정도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본문들이 설명하는 은혜의 극대화 형태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살펴본 다섯 문헌 가운데, 어떤 문헌은 은혜의 비상응성을 극대화하고, 다른 문헌은 (그만한 이유를 갖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본문은 “은혜를 믿으나” 다른 본문은 은혜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가 정의상 비상응적이라는 가정과 은혜가 비상응성의 형태로 극대화되지 않을 경우 “희석되거나” “부패하게 된다”는 가정을 거부해야 한다. 이 가정은 역사적 이유들로 말미암아 “은혜”에 관한 현대의 사전적 정의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가정은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바울의 영감하에, 은혜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은혜의 비상응성은 단지 은혜의 가능한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은혜 용어가 사용될 때 언제나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_제10장 “제2성전 시대 유대교와 은혜의 다양한 역학” 중에서
이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곧 갈라디아서의 바울 신학은 가치와 상관없이 주어진 신적 자비의 확고한 행위로서 그리스도-선물에 대한 바울 자신의 확신 및 경험을 통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고 말이다. 그리스도-사건은 율법이 규정하는 “의”와 더불어 인간의 기준에 비상응적이고, 유대교나 비유대교의 가치 전통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동체를 창출함으로써 모든 가치 체계를 재조정했다. 이 비상응적인 선물은 상징적 자본에 대한 이전의 척도를 무너뜨리고, 더 이상 율법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 및 명예의 기준을 확립했다. 따라서 선물로서의 그리스도-사건은 바울이 행한 이방인 선교의 기초이고, 이 기초 안에서 바울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민족적 또는 사회적 가치 계급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며, 이 이례적인 사건에 따라 자기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다른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런 갈라디아서 해석은 위에서 개관한 네 가지 해석과 여러 가지 면에서 중첩될 것이다. 하지만 네 가지 모든 해석과 차이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주석적으로 튼튼하고, 역사적으로 개연성이 있고, 갈라디아서의 다양한 양극성을 성공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해석이 우리 자신의 현대적 맥락에서 논리적이며 생산적인지, 그리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갈라디아서의 폭발적인 힘을 복제해낼 수 있는지 묻는 것도 적절하다.
_제11장 “갈라디아서 구성하기” 중에서
로마서 9-11장의 핵심 주제, 곧 근본적으로 비상응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이 강론 첫 부분과 끝 부분을 연계시킬 뿐만 아니라 많은 개별적 주제들을 하나의 공통 패턴으로 묶어준다. 바울은 성서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추적함으로써 그리스도-사건을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일치시키는 한편, 선물/은혜와 자비 언어를 개념적으로 일치시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 방법을 이런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현재의 많은 국면들이 이해 가능하다. 남아 있는 유대인 신자들(은혜로 택함 받음), 유대인의 불신앙(율법의 행위의 가치를 무력화시킨 “돌”에 걸려 넘어짐), 이 걸림돌 안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목적(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이방인 신자들의 역설(하나님의 차별 없는 긍휼을 통해 구하지도 않은 목표를 이룸). 이 모든 기이한 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가치, 이 둘 사이의 비상응성에서 나오는데, 이 비상응성은 이방인의(또는 다른 어떤 자의) “자랑”에 대한 바울의 해독제가 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부르심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은혜의 비상응성에 따라 이스라엘의 “불순종” 너머를 바라보는 확신을 갖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품으시는 자신의 긍휼로 “불경건함”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_제17장 “이스라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적 긍휼(로마서 9-11장)” 중에서
따라서 본서에 제시된 바울 해석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동반한 원래의 선교 상황에 은혜의 비상응성이 미친 역학 관계로 되돌아가는 아우구스티누스-루터 전통을 재상황화한 것으로, 또는 최고의 역사적, 주석적 안목을 바울의 은혜 신학 틀 속에 두는 “새 관점”의 견해를 재형성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분열의 두 진영에 속해 있는 해석자들과 중요한 방식으로 의견을 달리하는데, 여기서 제공한 해석은 이 두 해석 전통을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해석은 이 두 전통이 지닌 각각의 힘을 바울의 역사적 상태와 바울 사상의 신학적 구조를 모두 책임지는 틀 안에 둠으로써 현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을 열어놓는다.
_제18장 “결론”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