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보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앞선다. 아이들은 보고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보는 것을 통해 주변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이웃과의 관계 속에 자리를 잡는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그림을 보는가는 우리의 사회ㆍ문화적 배경, 지식이나 종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렇듯 보는 시각은 변화의 지배르 받는다. 이러한 사실은 그림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책은 회화를 감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딱딱한 교과서가 아닌, 하나의 신선한 자극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흥미로운 관찰과 새로운 시각을 위한 자극, 즉 그림 관찰에 있어 정신적인 모험을 위한 자극이 될 것이다.
--- 서문, <보는 즐거움에 대하여>
서양 회화사에서 그 어떠한 그림도 <모나 리자(라 조콘다)>처럼 신비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가 이 그림의 탄생에 대해 서술한 바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초상화에 자주 나타나는 우울한 분위기를 없애고 모나 리자가 가벼우 ㄴ분위기 속에서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악사와 광대를 불렀는데, 그로 인해 모나 리자의 미소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사리는 이 그림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18세기 말까지 이 그림은 단지 화가의 역량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으로, 그리고 자연을 모방한 뛰어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또 19세기 후반이 사람들은 이 모나 리자를 '악마적으로 해석된 여성다움의 화신', 즉 '요부(妖婦)'로 해석했다. 당시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모나 리자의 형상은……모든 감각적 고통을 지닌 영혼이 스며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마치 흡혈귀처럼 이미 여러 번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무덤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하다. 모나 리자는 호수 속으로 가라앉아 깊은 곳에 떨어진 날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예술지상주의 운동의 지지자였던 영국의 월터 페이터의 말 속에서, <모나 리자>의 경우 눈에 보이는 것에 반해 상상된 것이 지금까지도 우위를 차지하고 잇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결과 <모나 리자>는 매춘부로, 병든 여인으로, 또는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으로 해석되곤 했다. 여기서 실제 사실과 탄생 연도 따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 리자>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이 걸작을 <야경(夜警)>으로 명명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1808년에 이미 제기되었던 주장처럼, 이 그림에는 밤이 배경이 된 장면, 즉 '야간 보초'나 '야간 순찰'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그림은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와 빌렘 반 뤼텐부르흐 소위가 이끄는 중대'를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1638년 프랑스 여왕 마리아 드 메디치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을 당시의 성대한 행렬에 고무되었던 이 중대가 주문해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말을 탄 코크 중대는 다른 중대들과 마찬가지로, 여왕을 환영하기 위해 도열해 있던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다.
코크 중대가 렘브란트에게 이 그림을 의롸한 것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640년경이었다. 그들은 그림을 위해 비싼 값을 치렀다. 사수협회 회관 연회장에 걸리게 될 이 그림을 위해 열여섯 명의 대원들은 1인당 약 100굴덴을 지불했는데, 다시의 통례대로 그림에서 각자 위치한 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어떤 사람은 더 적게' 지불했다. 우선적으로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렘 반 뤼텐부르흐는 더 많이 지불해야 했다. 이와 달리 중경에 있는 키가 작은 한 여인은 한푼도 지불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야경>은 자유로운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에서 인기가 있었던, 집단초상화의 한 형태인 '사수(射手) 집단초상화'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코크 부대는 암스테르담의 사수협회인 '클로베니어스(Kloveniers)'에 속했다. 이들은 원래 시민 방위를 목적으로 편성되었는데, 17세기에 사교적인 모임으로 바뀌게 되었따.
--- 렘브란트, <야경(夜警)>
1800년의 한 기록에 따르면, 고도이가 여인의 나차화만을 보관하기 위해 마련한 방인 '에로틱 캐비닛'에 고야의 <마하>그림들과 함께 벨라스케스의 <거울 속의 비너스>가 걸려 있었다. 이 작품은 알바 공작 부인이 고도이에게 선물했던 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거울 속의 비너스>는 스페인 회화가 탄생시킨 최초의 작품이자,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가 그려지기 전까지는 유일한 나체화였다. 150년 동안 어떤 화가도 감히 여자의 나체를 묘사하지 못했다. 당시 종교재판소의 힘이 너무도 강했기에 고야도 1815년까지 이 그림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해야만 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여신인 비너스는 관찰자에게 등을 보인고 있다. 다만 아들 아모르가 들고 있는 거울을 통해서만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고야의마하는 완전히 다른다. 그녀의 나체는 신화적으로 '변명을 하고 있는ㄴ' 것이 아니다. 고야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도전적이며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으로, 비너스의 나체처럼 세련되고 관능적이기도 하다. 고야는 이 여인을 수동적인 존재로, 성적쾌락의 대상으로 깎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옷을 벗은 마야>에서, 벨라스 케스가 <거울 속의 비너스>에서 택했던 대로, 부두아(Boudoir, 우아한 부인의 방)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 가장 평범한 배경을 택했다. <옷을 벗은 마하>의 시선 속에는 선정적인 카리스마와 계산된 유혹이 숨어 있다. 그녀가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잇는 베개와 쿠션들은 '차가운 색조'를 띠어, 따뜻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육체의 살색을 강조하고 있다.
--- 프라시스코 데 고야, <옷을 벗은 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