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대한 엇갈린 평가, 세계적인 열풍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의 방법으로 주류 경제학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경제학이 있다면, 비주류 경제학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비주류 경제학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입니다. 물론 지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많이 위축되었기 때문에 비주류 경제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류 경제학으로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우는 경제학이 있습니다. 주류와 비주류가 있으면 당연히 둘 사이에 논쟁이 있을 겁니다. 비주류 경제학에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할 때 내세우는 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주류 경제학은 자본가에게 붙어서 기생하는 집단이라는 거죠. 거꾸로 주류 경제학에서는 비주류 경제학을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념적인 생각 혹은 자기들만의 도그마에 빠져 현실적이지 못한 주장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은 비단 경제학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회학도 마찬가지 양상인데, 주류 사회학에서 학자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회통계입니다. 그런데 비주류 사회학자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
는 것이 바로 사회통계입니다. 결국 실증의 문제이고, 그래서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주류에서 비주류를 비판할 때 이런 통계, 수치, 데이터에 관련된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피케티는 다릅니다. 피케티는 철저하게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물론 요즘은 주류 경제학도 조금 변했지만, 기본적으로 주류 경제학의 출발점은 실증입니다. 통계와 실증적인 자료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피케티는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의 방법을 사용해서 주류 경제학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겁니다. 그래서 논쟁이 되고, 주류 경제학 내에서도 비주류 경제학 내에서도 엇갈린 평가가 나온 겁니다.
---「피케티, 주류 경제학에 어퍼컷을 먹이다」중에서
그러면 피케티는 기존의 경제학 또는 주류 경제학과 무엇이 다를까요? 피케티는 주류 경제학에 대해서 역사 없는 학문으로 전락했다고합니다. 『21세기 자본』을 읽고 사람들이 놀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자료입니다. 엄청난 양의 과세 자료를 모두 조사하고 분석했습니다. 동시대의 것만이 아니라 예전의 과세 기록부터 전부 다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통시적 방법으로 연구한 겁니다. 이것을 피케티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과세 기록들에 대한 역사적이고 통계적인 연구가 학문적으
로 일종의 주인 없는 땅, 즉 경제학자들에게는 너무 역사
적인 분야이고, 역사학자들에게는 너무 경제적인 분야였기때문일 것이다.
_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2014, 글항아리
경제학자들은 너무 역사적이라 피하고, 역사학자들은 너무 경제적이라 피했던 걸 피케티는 했습니다. 경제학자이지만 역사에 대해서, 다른 학문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피케티의 비판」중에서
피케티는 존 롤스와 같은 입장은 아닙니다. 피케티는 사회적 차별은 가능하지만 선천적 차별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차별이라는 것은 후천적 차별입니다. 후천적 차별은 가능하지만 선천적 차별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피케티입니다. 프랑스 인권 선언에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선천적인 차별은 불가능하며 선천적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회주의와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는 모든 차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피케티는 선천적 차별은 불가능하고, 후천적 차별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사회주의자들이 볼 때 피케티는 사회주의자도 빨갱이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피케티를 사회주의자,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일입니다.
어쨌든 피케티가 말하고 싶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선천적 차별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회적 차별은 가능합니다. 단 공익에 바탕을둘 때만. 피케티는 경제학자입니다. 『21세기 자본』은 경제학 책이죠. 그러면 선천적 차별, 사회적 차별이 갖는 경제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면 됩니다. 책의 소제목 중에 핵심 질문이라고 써놓고 ‘노동이냐 유산이냐’라고 묻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산이 바로 선천적 차별입니다. 이건 안 된다는 겁니다.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차별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차별이 사회적 차별입니다. 그런데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차별도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피케티가 말하고 싶은 바입니다. ‘유산을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는 사회는 나쁜 사회야. 그렇다고 사람이 다 평등해야 하는 건 아니야. 경제적인 불평등은 가능하고, 노동에 따른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오직 공익에 기반을 둘 때만 가능한 거야. 그게 프랑스 혁명이고 근대적 부르주아 혁명과 자유주의의 핵심 이론이고, 나는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시민혁명의 가치를 지금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피케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중에서
그리고 이 핵심에 대한 피케티의 통렬한 비판이 나오는 겁니다. 자료의 한계, 이념의 한계도 비판했지만 피케티의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평등해지는 것이 산업 부문 간의 평화로운 이동 때문이 아니라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때문이라고 피케티는 말합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빈부 격차가 심화됩니다. 이건 어느 나라나 다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미국만 예외적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예외적 현상이 생기는 것은 쿠즈네츠의 생각대로 산업 부문 간의 평화로운 이동 때문이 아니라 전쟁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왜 평등해질까요?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적으로 표현하면 자본수익률은 죽은 노동이고, 경제성장률은 산 노동입니다. 자본수익률은 마르크스의 논리로 따지면 자본입니다. 마르크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죽은 노동은 생산수단입니다. 산 노동은 내가 직접 하는 노동이고요.
경제성장률은 우리의 노동으로 이룬 성과, 자본수익률은 불로소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피케티는 경제성장률이 자본수익률을 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노동소득이 불로소득을 못 이기는 거죠. 그래서 피케티는 결국 도덕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주장을 한 겁니다. 자본수익률을 또 다른 말로 바꾸면 상속받은 재산입니다. 축적된 재산이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이 축적된 재산이 한 방에 날아가버리는 겁니다.
---「쿠즈네츠가 정말 맞을까」중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와 성장이라는 단어가 늘 붙어다닙니다. 그러다보니 경제학은 당연히 성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경제학의 본령은 분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어떻게 건전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논의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맬서스가 ‘사람 죽여서라도 우리가 뭔가 해나가자’라고 한 건 아닙니다. 리카도가 비교우위를 통해서 빨리 성장하자고 주장했던 게 아닙니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