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과 세계사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내와 강을 수백 개 건너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몽골이 세계의 문을 열자,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과 지식도 새로 흐르기 시작했다. 몽골인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데려갔다. 이런 이동에는 기념비적인 것도 있었고 사소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뜨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식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서구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도 옮겨놓았다. 중국에서 기독교 교회 건립, 페르시아에서 절과 탑 건립, 러시아에서 무슬림 쿠란 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몽골인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할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 pp.20-21
일련의 가족법 개혁
칭기스 칸은 적자(嫡子) 문제를 둘러싼 분열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부인이 낳았건 첩이 낳았건 모든 아이는 적자라고 선언했다. 같은 이유로 간통도 금지했다. 사실 몽골족은 간통을 다른 민족과 다르게 규정했다. 여기에는 여자와 남편의 가까운 친척들 사이의 성관계, 남자와 여자 하녀 또는 가족 내의 다른 남자의 부인 사이의 성관계는 포함되지 않았다. 게르의 일은 게르 내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초원의 일은 초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칭기스 칸의 언명에 따라, 간통은 서로 분리된 가구의 결혼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었다. 또 이 관계가 가족들 사이의 공개적인 갈등을 낳지 않는 한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
--- pp.126-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