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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외로움을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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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외로움을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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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370g | 152*210*20mm
ISBN13 9791195288830
ISBN10 1195288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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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현새로
중학교 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TV 시리즈를 보며 감동하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양한 책을 섭렵하며 세계 일주를 꿈꾸던 소녀.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다가 받은 마지막 월급을 탈탈 털어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난다.
지금까지 10개국, 30여 개가 넘는 도시를 여행했고, 국제적인 이사도 여러 번 했다. 결혼 후 3일 만에 가서 살게 된 싱가포르에서 1년 4개월, London College of Printing 학교에서 Professional Photography Practice 과정을 공부하며 1년, 인도 뉴델리에서는 남편, 딸아이와 함께 4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첫 번째 개인전 [색깔 있는 도시 풍경(사진 있는 마당, 1999)]을 시작으로 [타인의 직접적인 삶(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 갤러리, 2005)], [One Day(관훈갤러리, 2007)], [힌두사원프로젝트(영아트갤러리, 2011)], [LA Art Show(Los Angeles Convention Center, 2014)]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인도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 사진으로 말하다》와 《인도, 신화로 말하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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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에는 편지가 무척 일반적인 소통 수단이었다. 친한 친구 간에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정성스레 쓴 편지나 엽서를 보냈다. 국내는 물론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국 친구까지 펜팔로 사귀던 세대. 조금 느리지만 그만큼 진중한 마음을 담아 주고받던 편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편지 한 통에 한껏 기분이 들뜨기도 하고, 이별을 고하는 편지 한 통에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이 ‘문득 사라지’기도 했으며, 그렇게 부서진 마음은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 p.27

예전에는 오로지 FM 방송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저녁 여덟 시에 방송하는 〈황인용의 영 팝스〉는 그 당시 나의 종교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만 했다. 전영혁 피디가 직접 나와서 들려주기도 했던 그의 특별한 선곡은 팝송의 신세계였다. 성시완이 진행하는 〈음악이 흐르는 밤에〉도 좋아했는데, 밤잠이 워낙 많아 그 시간쯤이면 아무리 기를 쓰고 안 자려고 해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잠 때문에 심야 방송을 제대로 못 듣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엄마는 내가 라디오를 너무 가까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해야 집중이 잘 된다고 부득부득 우겨가면서 엄마를 설득했다. 오죽하면 내가 죽으면 라디오도 함께 묻어 달라고 했을까.
--- p.82

그때는 기나긴 터널처럼 끝이 안 보이던 청춘이라는 시간이, 지금 돌아보니 어느덧 저만치 뒤에 있다.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청춘, 그 뒤에 맞이한 나의 여름은 과연 녹음이 무성했던가. 생각해 보면 여름을 통과하던 그때도 무성한 녹음을 즐기기보다는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숨이 막힌다고 불평했던 것 같다. 인생의 가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격정적이었던 봄도 뜨거웠던 여름도 모두 가을에 맺을 열매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겠다.
--- p.99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좋았던 점은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이 모여 놀 수 있는 지역이 한정적이었던 그 시절에 종로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명소였다. 종로에서 만나기로 하는 약속은 대부분 종각역 옆에 있던 -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 ‘종로서적’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렵 외국인 영어 회화 강의가 막 유행하기 시작해서 종로3가에 있는 파고다어학원에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 어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나면 종로서적 뒷골목 주점이나 카페로 자리를 옮겨 ‘2차’를 하고, 단성사나 서울극장, 피카디리극장 등에서 영화 보는 것이 놀이 문화의 전형이었다.
--- p.129

1984년 여의도 사학연금빌딩 맞은편 지하상가에 ‘London Pub’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컸는데, 그곳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 가끔 찾아가곤 했다. 세월이 흘러 1997년, 나는 진짜 런던에 있는 펍에 가서 흑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런던의 펍에 가 보니 ‘펍’을 주점이나 선술집처럼 한 단어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서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거리에 외국인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이 더러 있다. 이런 곳일수록 주점도 동네 밀착형이라 그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어릴 적 생일잔치를 했던 펍에서 훗날 결혼기념일 파티를 여는 식이다. 물론 가장 주된 역할은 마을 아저씨들이 모여 대형 화면으로 축구 경기를 보는 사교장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런던에서 펍은 단순한 주점 그 이상이었다. 마치 근사한 마을회관 같다고나 할까?
그런 주점에 나를 잘 아는 다정한 주인장이 있고, 언제라도 마음 나눌 동네 친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스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할 만큼 우울할 때도,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을 정도로 우울이 고인 날에도, 그 주점에 들르면 권태스러운 고민을 모두 털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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