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작업을 하다 보니 색연필을 다 써 버려서, 모처럼 화방에 다녀왔다. 들어가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곳이 화방 아닐까? 들뜬 마음에 이미 잔뜩 있는 것들도 사 와서는 뿌듯한 마음으로 한켠에 잘 놓아둔다. 새로 사 온 색연필들이 서로 부딪혀 달각거리는 소리가 좋아 자꾸만 필통을 눌러 보고 있다. --- p.8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끊임없이 찾기, 올해는 그것만 생각하자.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도 괜찮다. 나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두는 걸 자꾸만 연습해야 한다. --- p.46
만나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도 같이 걸을 때 손에 든 짐을 나와 반대편으로 옮겨 드는 모습에 좋은 사람이구나, 확신한 적이 있다. 훗날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런 사소한 걸로 믿은 거냐며 넌 웃었지만, ‘그 사소한 것’을 배려하는 모습에 나는 어떤 것보다 큰 확신을 했었다. --- p.55
샐러드를 그리고 있다. 잎사귀를 한 장씩 한 장씩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만큼 다양하고 예쁜 색도, 모양도 없겠다 싶어 그림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 p.81
“오늘도 정말 애썼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은 진심으로 마음이 충만해진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클라이언트와의 일을 무사히 마쳤고,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싶었던, 너무도 어렵게 느껴졌던 작업을 무탈하게 끝냈고, 감정적으로 나를 힘들게 만들던 사람에게는 정중히 안녕을 고했다.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열심히 해 나가고 있다. 정말로. --- p.184
주어진 글을 읽고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 어렵지만 참 좋아하는 일이다. 평소 개인 작업을 할 때는 생각지 못했던 장면 등을 그리게 되어 어색한 결과물이 되기도, 생각보다 더 좋은 그림이 되기도 하니까. 좋은 글을 만나면 그 글에 품는 애정만큼, 그리는 내내 애착이 가는 그림이 나에게도 많이 생긴다. 나도 그런 좋은 글 옆에서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내는 사람이고 싶다. --- p.348
테이블 야자에 볕을 쬐여 주려고 창문가에 30분 정도 놔뒀더니, 그 사이 물이 꽝꽝 얼어 잎이 죄다 노랗게 변해 버렸다. 조금 추워도 볕을 쬐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데. 녹색 빛이 살아있는 줄기만 몇 개 놔두고 잘라내는 내내 마음이 안 좋다. 언젠가 들었던 말 때문일까. 결국 네가 한 행동은 날 위해서 한 게 아니라 네가 좋아서 한 행동이었을 거라던 말.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 p.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