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알게 된 나이는 몇 살 때인가요? 알고 난 뒤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된 나이는 너댓 살쯤 됐을 거예요. 다른 집에는 아버지가 있는데 왜 난 없을까 생각했지. 엄마한테 물으면 애들은 알 것 없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혼자서는 안 풀리는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다른 집에는 논도 많이 있고, 산도 있고, 밭도 있고 가을 되면 곡식도 거두어들이는데, 왜 우리집은 아무것도 없을까.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였지. 근데 좀 크고 보니까, 큰집에서 우리가 분가할 때 아무것도 안 줬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내가 어느 정도 커가지고 서울 갔다가 내려와서 큰아버지 큰어머니, 할머니께 분가할 때 우리 아버지 밑으로 논 두마지기 있었다는데 왜 안주시느냐, 주십시오, 이랬더니, 이제 자기들도 자식들 공부시키고 장가보내고 없다는 거죠. 그래도 줄 건 줘야 할 것 아니냐 이러면서 한바탕 싸우고 진주로 이사를 들어와 버렸어요.
--- p.13
역사에서 보면 정의는 항상 이겼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진실은 밝혀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 때문에 이 나이에라도 밝혀보자 싶어 밝히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개인사를 이렇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사건의 진실규명과 아버지를 비롯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억울하게 가신 넋들을 위로하고 살아남아서 고통스러웠던 유족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남은 여생이나마 마음 편히 살다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직도 실체를 밝히지 못한, 불법적 살인에 참여한 이들의 가슴속 불안과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 p.24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학살당하셨는지 알고 계신 내용을 말씀해주세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무 죄없이 갔다고 해요. 엄마 따라 밭에나 논에나 갈 때 위에 마을 구장이 열 살 정도 많은데, 길에서 만나면 그 할배가 우리 엄마한테 인사를 45도로 굽혀서 하는 걸 봤어요. 우리 엄마는 새파란 나이였는데도, 인사를 받기는커녕 고개를 홱 돌려버렸어요. 지나가고 나면 ‘더런 놈 나한테 인사를 해? 저놈이 들어가지고 죄 없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 도장 받아가서 다 죽게 만들었다고…. 지는 도망 나와삐고, 인사가 뭣이고 더런 놈’ 이랬어요. 논이나 밭에 따라갈 때 그 아저씨가 자주 만나지더라고. 위에 마을이거든요. 저는 그 나이 든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엄마가 이상하고 나빠 보였어요. 볼 때마다 그래서 엄마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었어요. 엄마가 그 사람만 보면 이를 갈더라고. 그때는 자세한 사연을 몰랐고, 나중에 제가 처녀 때에야 그 사연을 들었어요.
--- p.107~108
박남숙 유족의 아버지 박사근불(당시 28세) 씨는 진주 본성동에서 철공장을 했다. 육이오 나던 해 7월 초 새벽에 사복 경찰이 권총을 들이대면서 박사근불이 나오라고 해서 체포해 간 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같이 살던 작은아버지 박문우 씨는 형님이 대한청년단에서 근무하고 새벽에 들어왔다고 했다. 박남숙 씨의 이모가 당시 교도관이어서 아버지 옷을 이모 편으로 전달하곤 했으며,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가기 전 이모에게 “우리 숙이가 보고 싶다”고 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경찰에 이마를 맞아 이모가 속치마를 뜯어 이마에 매어주었다고 한다. 사람을 실은 트럭이 명석면 용산리로 갔다는 것을 이모 편으로 듣고, 할머니, 어머니, 고모부가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비가 오는 데다가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고랑에는 핏물이 흘렀다고 한다.
--- p.126
-정병표씨는 아버지가 그렇게 학살로 돌아가셨다는 걸 언제 아셨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세 살 됐을 때지. 그 당시에는 이것저것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고.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저희 어머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 해줬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그 당시 고통이 심해가지고 (아버지가 나가서 학살되기 이전에) 밤이면 누군가 나타나서 사람을 찾고 하니까 숨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리고, 아버지가. 그래서 (그걸 봐왔던 어머니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충격이 커 놓으니까 어머니 혼자서만 감추어 놓고 있고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라. (밤이면 누군가 아버지를 찾으러 온 기억 때문에 어머니가 충격이 커서.) 그래 이제 엄마보고 ‘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한 번 내가 딱 물어봤어.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다’ 이 말이 끝이었어요.
--- p.222~223
지가 안 겪어보면 아무도 모른다. 지가 겪어봐야 그렇게 살았다 싶으지. 아무도 모르기로. 대통령이 공약을 했다 하더만, 이거 해결해준다고. 나라가 이리 시끄러운데 해결이 되겠나. 그런데 뭐 광주니 어디니 샀는 거는 자꾸 보상 주고 그런다매. 그런데 모르지. 내 평생에 될 건가 안 될 건가 몰라도 만약에 못 하고 죽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다. 진주시장이 (위령공원 장소를) 어디라고 확실히 정해는 안줘도 해준다고 약속을 했다 하대. 기대는 하지만 그 기대가 설 것인지 어그러질 것인지는 모르지. 딱히 할 말도 없다. 서러운 거 그거는 말로 다 못하겠다. 다문 얼마라도 보상받고 위령제 지내는 그거라도 있으면 내가 풀고 죽겠는데 그것도 못보고 죽으면 너무너무 한이 많을 것 같아.
---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