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편찮으셨던 때가 추석 전이었다.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거든 5일 장으로 하고, 문상객들에게 소고깃국으로 잘 대접해라. 경비는 내가 통장에 전부 준비해 놨다.”
그러면서 통장을 2개 주셨다. 당신의 장례에 쓰라던 통장에는 600만 원이 있었다.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수의는 큰 누님이 안동포로 미리 마련해 두었었다. 당신 몸이 점점 나빠지시니 추석 전에 죽으면 조문객도 적을 뿐 아니라 남의 제사도 못 지내게 한다고, 추석 지내고 죽기를 원하시더니 음력으로 1992년 8월 18일 아침 8~9시 사이에 운명하신 것이다.
종신한 아들도 며느리도 없었다. 불효자다. 형님은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집에 오셔서 환갑은 아니하고 환갑기념으로 하와이여행을 다녀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6.25 전쟁 때 회갑이셨는데, 난중인지라 회갑연을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집은 어머니와 자식 누구도 회갑 잔치를 생략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있을 땐 어디 어디가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형님이 오시면 아픈 티를 안 내려 하셨다. 파리가 앉은 방바닥을 파리채로 힘차게 때리시며 건재하신 듯 연출하셨다. 형님이 계시는 동안엔 건강한 척 하시다가, 형님이 가실 때가 되면 형님의 차가 안 보일 때까지 마루에 서서 울고 계셨다.
--- 「1장. 부모님의 생애」중에서
다음 해 1950년 6월 25일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른들이 모여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며 방송을 들으니 국군이 적을 퇴치하고 북진한다고 한다고 했다. 그때의 소식통은 라디오를 듣거나 사람들에 의해 풍문으로 아는 게 다여서 오보가 많았다. 라디오도 귀할 때라서 라디오가 있는 집이 몇 안 되어, 라디오 있는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많은 사람의 일과 중 하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래도 국군이 북진한다는 라디오 방송에 안심하고 국군이 열심히 싸워 적군을 무찌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에게 참모들이 전황을 속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전쟁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국군은 적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방어 전쟁 중이었다. 1950년 6월 28일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단다.
1950년 7월 6일경이다. 시장 거리에 나와 노는데, 쿵쿵하는 소리가 들리며 따다닥, 따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전쟁터가 가까이 있는 것은 몰랐다. 오후 12시경 일단의 국군들이 덕산시장으로 행군해 와서 우리는 행군 뒤를 쫓아갔다. 시장에 있는 김정현 씨 모친이 운영하는 식당에 와서 밥 좀 해달라고 해서 부인들이 모여 음식을 급히 했다.
곧바로 배식을 했는데 그사이에도 쿵쿵 소리는 계속 났다. 국군들이 배식을 받아서 식사하는 도중 장교가‘ 모두 집합’하는 소리에 식사 중이거나 대기 중이던 모든 병사가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진천 방향으로 뛰어갔다. 우리가 어른들에게 어떻게 된 군인 아저씨들이냐고 물어보니, 김석원 장군 휘하의 7연대 군인인데 진천, 이월, 광혜원에서 국군이 인민군과 전투 중이라 봉화산 전투를 위하여 간 것이라고 했다.
--- 「2장_6·25사변」중에서
한 달 전에 선을 봤었다. 마음에 든다고 했으니 처가 쪽에서 오신 것이다. 미리 연락도 없이 오셨다. 부지런히 자전거를 타고 비틀거리며 집에 갔다. 어머니께서 얼른 닦고 옷 갈아입으라고 하신다. 나는 술이 잔뜩 취한 상태로 괜찮다며 사랑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올리고 무릎 꿇고 앉아있는데 온몸이 왔다 갔다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시다가 나가라고 눈짓을 하신다.
얼른 일어나는데 술에 취해서 옆으로 고꾸라졌다. 부시럭거리며 일어나서 나왔다. 나와서 생각해보니 혼사는 없던 일로 되겠구나 싶었다. 선보러 가서는 술을 못 한다고 어머니도 나도 똑같이 거
짓말을 했는데 신랑집에 와서 보니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장래 장인이 될 분 앞에서 추태를 보였으니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인연이 있으면 될 테지.’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혼인하자고, 후에 처가에 가서 우리집에 장인어른 오셨을 때 돌아가셔서 무슨 말씀 없으셨는지 물어보니, 아무 말씀 없으셨다고 한다. 사윗감은 불합격이지만, 사돈네는 합격이었나 보다.
--- 「5장_결혼&가족 이야기」중에서
나는 오래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너무 오래 살면 사회적으로도 피해가 클 뿐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불행해질 수 있다. 조물주가 주신 만큼 살되 건강하게, 생활에 여유 있게, 민폐가 되지 않게 살다가기를 소망한다. 태어나서는 부모의 보살핌에 살고, 젊어서는 자기 능력에 살고, 늙어서는 건강과 여유로 고종명 하는 것이다. 모든 이의 소망일 것이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부모 잘 만나 호강하고, 행복하게 80여 성상을 지내왔다. 부모님께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자식들도 모두 제 삶에 충실하니 대견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잘살고 못 사는 것은 제 복일 테다. 건강하며 즐겁게 각자에게 주어진 생을 걸어가는 게 인생이지 싶다.
아버님께서는 본인이 가실 것을 아시고 며느리에게 손발을 씻기라 하시더니, 저녁을 조금 드시고 주무시다 이튿날 새벽 1시 반경 운명하셨다. 말년에 풍을 앓으신 어머니는 조금 불편한 거동으로
누워 계시다가 1주일 만에 운명하셨다. 나도 아버지 어머니의 피를 받았으니, 그렇게 가기를 희망한다.
--- 「7장_형제간 우애와 활기찬 노년생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