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오늘의 세계 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기독교(주로 개신교)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이나 신앙적 이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한국 크리스천들이 과연 하나님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신앙과 신학 속에서 알차게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안타깝게 묻고 싶었습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새로운 세기에서는 염려스럽게도 ‘스스로 돈독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평화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전쟁의 소리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의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립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점에서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실물 예수를 삶의 중심에 다시 정중히 모셔야 합니다. 평화와 사랑과 정의의 주님을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 신학의 중심에,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에 정중히 모셔야 할 것입니다. …
갈릴리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기쁜 소식이기에 유대 지배 세력이나 로마 지배 세력에게는 충격적으로 불온한 소식이요 사건이었습니다. …
예수께서 가장 힘주어 강조하신 계명,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하는 계명은 바로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보다 보이는 이웃 사랑을 통한 하나님 사랑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적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바른길이었습니다. 밥상공동체를 통한 계급타파도 바로 열린 사랑의 실천행위였습니다. …
사랑이 자기 비움일 터인데 가장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요 그 하나님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보다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성육신은 자기 비움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육신 사건을 성부의 자기 비움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성자의 자기 비움입니다. …
--- 「1부_ 다시, 역사적 예수를 바라보다」 중에서
한반도를 아프게 옥죄어온 분단, 열전, 냉전의 아픔을 겪으면서 갈릴리 예수께서 간곡하게 당부하셨던 원수 사랑의 명령이 더욱더 강렬하게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로 36년간 부당하고 아프게 살았던 우리 민족이 이른바 해방을 맞았지만, 진정한 민족 해방과 광복은 아직 단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다고 판단하기에 그러합니다. …
사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그렇게 처형했던 사람들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철저한 자기 비움, 곧 자기 지움의 실천, 바로 그것이 원수 사랑을 통한 악의 극복 행위였습니다. …
예수께서 철저한 비폭력 사랑으로 원수에 대응하신 것은 예수 혼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객관적 사실로도 증명이 됩니다. 그의 제자 중 단 한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폭력적 내란음모나 내란 행위, 곧 집단적 무력 투쟁을 조직화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 혼자 그 끔찍한 극형을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지요. …
눈은 눈, 이는 이의 “때문에의 논리”에서 내 눈을 때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껴안아 주는 “불구하고의 논리”를 촉구합니다. 이 가치는 ‘다름’을 포용해주고 존중해주는 가치입니다. 다름이 클수록 더욱 뜨겁게 포용해주고, 더욱 존중해주는 마음입니다. …
--- 「2부_ 오직 선제적 사랑으로 원수를 이겨야」 중에서
로마 형법을 동원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온갖 궤휼과 조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갈릴리 예수의 선택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바보스럽게’ 감동적입니다. 그 특이함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원래적 가치라 하겠습니다. …
부활의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숯불을 피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생선과 빵을 굽고 계셨습니다. 친히 밥상을 차려 놓고 계셨지요. 부활의 예수는 강론하거나 토론하거나 말로만 위로하거나 추상적 담론을 펼쳐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멘붕 상태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친히 숯불을 피워 구운 생선과 빵으로 따뜻한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
역사의 예수나 부활의 예수는 자신을 항상 이 양 떼와 동일시하시고 그들과 공감하셨고 동고하셨지요. 그들과 역지사지하셨고 역지감지하셨고 나아가 역지식지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같은 뜻이지요. 꼴찌와 지극히 작은 자와 동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마 25:31-45)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 「3부_ 몸의 부활은 실체적 변혁의 동력」 중에서
만일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과연 오늘의 교회로 발길을 옮기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향해 던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 크리스천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
복음을 알리는 행위는 기고만장의 십자군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남을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도 아닙니다. 남의 기를 꺾는 행위는 더더욱 아닙니다. 남을 협박하는 행위는 정말 아닙니다. 오히려 남의 힘과 기를 세워주고, 남의 소망과 꿈을 이뤄주는 자기 비움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과 공감의 행위입니다. …
꼴찌를 위한 교회, 꼴찌와 공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뜻은 참 희망이 육화되는, 구체화되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꼴찌나 나중된 자들, 곧 변두리 인생들이 희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
서로 상대에게 우아하게 지려고 즐겁게 앞장섭니다. 누구를 사랑하기에 그 사람에게 지고 싶어 자원하게 되는 그런 관계가 펼쳐지지요. 이 사랑의 역설을 이해한다면 자유의 역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잔치에서는 모두가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즐겁게 제한하면서 남을 더 자유롭게 해주지요. 그러면서 마침내 서로가 더욱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게 되지요. …
--- 「4부_ 예수 따르미, 더 예수답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