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의 프랑스 팬들의 경우, 미국 시리즈, 일본 드라마, 한국 드라마 사이에 미묘한 위계의 문제가 존재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미국 시리즈는 형식적으로 우월할지 몰라도 재미가 덜하고, 일본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와 같은 종류이고 더 잘 만들어졌지만 한국 드라마보다 매력과 재미가 덜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태도는 “형식미? 그래서?”라는 식이고, 일본 대중문화 애호가라는 전력과 일본 드라마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알게 되었기에 일본 드라마에 대한 향수와 기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보게 되고 다음 회를 기다리며 보게 되는 중독적 드라마는, 매력적 배우들과 이해하기 힘든 모던 및 전통이 한데 엉켜 있는 한국 드라마라고 토로한다.--- p.41
2011년 6월 SM의 소속 가수들을 대거 동원하는 콘서트가 파리에 있는 중대형 공연장 제니스에서 열렸다. 이 콘서트는 표가 온라인 판매 시 15분 만에 동나 팬들이 플래시몹으로 호소하여 두 번째 공연 날짜를 얻어냈고, 이 사실은 방송 취재를 통해 한국의 미디어에 널리 보도된 바 있다. 한국 미디어의 요란한 보도 속에서 SM 아이돌들의 파리 공연은 한류2.0을 알리는 팡파르 정도로 인식되었다. 당시의 보도 내용을 보면, 한국 미디어의 현상이해가 표피적이고 이벤트성 보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훨씬 오래전부터 형성된 문화적 변동에 의한 것이고, 이 변동의 화려한 조명을 현재 한국산 콘텐츠들이 받고 있을 뿐임을 숙지할 필요성이 드러났다. 단지 한류 현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지역화 또는 지역 문화정체성 문제를 학술적 화두로 만드는 작업의 필요성이 드러난 것이다.--- p.183
비록 상업적 용도는 아닐지라도 자기소유가 아닌 문화물에 유통을 목적으로 자의적으로 자막을 다는 팬섭 활동은 인터넷에서 소통되는 문화콘텐츠에 저작권과 지적소유권을 적용하려는 각국의 법과 상충된다. 따라서 팬섭 활동은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잣대로는 불법 업로드 및 다운로드와 더불어 ‘어둡고 부당한’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팬섭은 문화물의 불법 통제를 막는 자연적 장벽인 언어를 해결해주어 불법적 소통의 대량화를 가능케 한 ‘악행’이지만, 그 자체로는 해당 언어권 애호자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를 향한 엄청난 재능기부인 셈이다. 팬섭의 주체들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의 엘리트로서 기술적, 문화적, 법적 장애를 헤치고 화면의 질과 자막 작업의 신속성을 높임으로써 오직 자신의 즐거움과 자막사용자(즉, 초국적 드라마 시청자) 커뮤니티의 이해를 위해서만 일한다.--- p.194
‘도라마 월드’의 멤버인 32세 남성 한드 팬 D는 만화와 만화영화의 팬이었다가 점차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드라마를 보다가 많은 작품이 프랑스어 자막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팬섭팀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팬섭팀의 열정은 단순 시청자들의 팬 커뮤니티 귀속감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빙할 때 인물들의 목소리를 서로 다른 성우가 담당하듯이 팬서빙도 여러 명의 팬서버가 인물들을 분담하여 번역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경성 스캔들〉의 강지환 역은 강지환의 팬이 자막을 다는 식이다. 이 작업 과정에서 강지환의 팬은 그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경외감을 가지고 그의 대사를 번역하고, 이 과정을 지켜보는 팬 커뮤니티의 멤버들은 그 드라마를 시청하고 싶은 열정에 전염된다.--- p.257
프랑스의 여성 팬이 열광하는 한국의 아이돌과 미남 스타들은 잘 만들어진 근육을 과시하고 패셔너블하며 로맨틱한 이미지를 잃지 않고 춤추고 노래할 줄 아는, 과거 할리우드 스타에 버금가는 성적 매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게다가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멀고도 ‘잘난’ 존재들이 아니라, 주간 연속극에서 먹고 자는 것을 볼 수 있고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서 실수하고 웃음거리도 되며,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어 있는, 스타와 미디어 셀러브러티의 중간쯤 되는 친근한 존재들이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친근하게 무너져주기도 하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상냥하게 팬들에게 웃어주는 한국의 연예인들은, 영화나 음반이 성공하여 스타덤에 오르면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도도해지는 할리우드와 서유럽 스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스타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얼굴짱을 지나 몸짱으로 발전한 연예계의 섹스어필 분위기와 각종 팬서비스들은 한류 스타들을 새로운 섹스 심벌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비-레인이 나온 최근의 〈닌자 어쌔신〉에서까지 아시아 남성을 한 번도 섹스어필한 존재로 대접해주지 않은 할리우드의 백인우월주의에 역행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현상이다.--- p.316
한국에서는 싸이의 예정되지 않은 전 세계적 성공을 바라보면서 국가이미지 향상에 기여했다고 정부가 문화훈장까지 수여했는데, 싸이의 진정한 공헌은 아마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케이팝의 지나치게 말끔하고 소독된 듯한 이미지를 ‘개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존의 케이팝 아이돌들과 상극적인 이미지를 지닌 가수 싸이, 공권력과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잘생기거나 깎은 듯한 춤을 추는 것도 아닌 그와 ?강남스타일?의 자의식적인 키치성이 특별한 홍보 없이 전 세계에 통했다는 것은 사실 매우 유의미한 사건이다. 자신의 성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능숙한 영어로 세계의 매체에 대응한 싸이는, 갑작스러운 성공에 묻혀서 준비된 대답을 반복하는 자유롭지 못한 케이팝 아이돌들과 너무도 다른 이미지를 유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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