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면적 스무 평의 세계이다. 소녀와 소년은 아침이면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책가방을 메고 스무 평의 교실로 입장한다. 이곳에서 오늘 하루치의 정성으로 삶을 살아낸다. 교실은 아이들에게 하루하루가 체험 삶의 현장이다. 치열하고 찬란하며 애잔하고 기막히다. 스무 평의 세계에서 지구를 쓰고, 우주를 상상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멍하게 있기도 한다. 때론 불안하고 때론 고독하다.
--- p.7
그러니까 열다섯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열다섯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봄. 그리고 봄. 또 봄. 봄 그 자체. 겨울을 막 벗어난 낯섦과 서투름, 어색함, 수줍음, 초록, 풋내, 싱그러움, 5월, 풀 내음, 꽃 내음, 꽃잎, 흩날리는 벚꽃 잎…. 서툴게 시작된 3월의 관계는 벚꽃 필 무렵이면 물러져서 슬그머니 서로 스며들고, 운동장 여기저기서 흩날리는 벚꽃은 촉매제 역할을 하는 중이다. 굳은 근육을 움직여 슬며시 웃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여겨진다. 웃음은 전염이 되어 자꾸자꾸 씰룩씰룩 웃다가, 웃는 걸 보다가, 그냥 웃어버린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기 때문에 웃음은 무죄인 것으로.
--- p.22
중간고사 첫째 날이었다. 시험 문제 출제로 인한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동료들과 새로 생긴 파스타집에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여유 있게 소박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창밖으로 낯익은 자들이 보인다. 우리 반 소년들이다. 오늘 시험을 잘 쳤는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신나게 근처 건물로 들어가길래 자세히 보니, 간판에 PC방이라고 쓰여 있다. 시험 기간에 PC방? 반사적으로 몸뚱이는 식당 밖을 향하고, 나는 단련된 목청으로 외친다. “야, 이자들아! 게 섰거라!” 다음 날 PC방 소년들이 애써 시선을 피한다. “시험이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PC방? 너희가 정녕 학생이란 말이냐. 니 죄를 니가 알렷다.” 이렇듯 따뜻한 조언을 하고 나니 소년 ㅅ이 말한다. “선생님, 저희랑 PC방 한 번만 같이 가시죠.”
--- p.38
3월은 아직 춥다. 봄은 언제 오는 건지, 봄 햇살은 얼마나 따뜻했었는지 봄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교실은 아직 검은 패딩이 점령하고 있다. 봄은 한참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어쨌거나 3월이 되면 봄맞이 꽃단장을 시작한다. 교무실을 둘러보며 명당을 찾는다. 앉은 자리에서 멀지 않으면서 다른 선생님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 인테리어를 크게 파괴하지 않는 곳을 탐색한다. 그곳에 내 소중한 카트를 주차한다. 마트용 접이식 카트 안에는 제목도 시가 되는 시집들이 들어 있다. 오십 권 넘는 시집들이 각기 다른 제목을 달고, 각자의 컬러를 입고 차곡히 쌓여 있다. 일 년 동안 함께할 우리 살림살이다. 3월이 되었으니 정성스럽게 시집을 고른다. 아이들과 한 해 동안 밥처럼 지어 먹을 시들을 고르는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털털털 카트를 끌고 교실로 들어선다. 트럭 만물상처럼 골라 골라 마음에 드는 시집을 골라. 아이들은 일 년 동안 꼭꼭 씹어 먹을 시집을 골라잡는다.
--- p.86
하루는 젊은 여선생님들 네 명이서 경쾌하고 즐겁게 퇴근을 하던 길이었는데, 그 녀석이 길목에 서 있었다. 퇴근길이라 기분도 좋고 자그마한 녀석이 혼자서 서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도 해서 다 같이 손을 흔들며 “ㅁ아~ 안녕~”이라고 했더니 그 녀석이… 그 녀석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우리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상상치도 못한 반응이었다. 짧은 순간 모두 함께 당황한 듯했으나, 네 명 선생님들이 동시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은 더 당황해서 입을 쌜쭉거렸다. 자그마한 소년이 어른처럼 센 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 p.120~121
꿈 앞에서 주춤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꿈도 없는 요즘 청소년’ 운운한다면, ‘요즘 청소년들’과 매일 하루 한 끼는 같은 메뉴를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울컥한다. 이런 사회를 만들어놓은 건 의도적이지 않았더라도 어른들이다. 눈코 뜰 새가 있어야 꿈도 꿀 수 있다. ‘꿈을 가지라’는 잔소리는 생각만 해도 억지스럽고 지긋지긋하지 않나. 그럼에도 올해 우리 반 학급 운영의 핵심 키워드는 ‘꿈, 배움, 따뜻한 마음’이다. ‘꿈’으로 잔소리하지 말라더니 앞뒤가 다른 사람이냐고 따져 물을 것 같아 웃음이 난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들이 꿈꾸기를 바란다. 은근하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꿈꾸기를 바란다. 최단, 최적의 경로를 위한 플랜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애석하고 애틋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이 몽글몽글 꿈으로 뭉쳐지길 바란다.
--- p.177
소년 ㅁ은 지금도 특유의 유쾌함으로 산들바람 살랑~ 불게 하겠지. 지금도 여덟 시 사십 분이 되면 스르륵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가거나,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ㅁ이 앞으로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머님의 마음이 좀 더 편해지셨으면 좋겠고, ㅁ이 꼭 멋진 철도 기관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차를 타고 매일 차창 밖 세상을 구경했으면 좋겠다. 성실하고 야무지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 p.199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기 전, “오늘 여러분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시를 심었어요. 앞으로 인생에서 누군가 시를 묻는다면 〈동해 바다〉가 생각나겠지요? 별것 아닌 일로 가족이, 친구가 미워질 때면 이 시가 생각날지도 모르지요.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보일 때,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 스스로를 다독일지도 몰라요. 그럴 때면 훌훌 털고 동해 바다행 티켓을 끊거나 운전대를 잡기도 하겠죠. 널따란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흔들리고 있는 스스로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인생에서 열네 살의 동해 바다를, 시를 기억해주세요. 시가 내게로 온 것처럼 기꺼이 여러분에게도 갈 거예요. 느리게 혹은 순식간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수업을 마무리하는데, “여러분 덕분에 행복했습니다”라는 의도치 않은 인사가 튀어나왔다. 나름의 방법으로 오늘 수업에 진심을 다한 아이들을 향한 나의 진심이었다.
--- p.213
가정통신문에 쓰여 있는 ‘존경하는 학부모님께’라는 글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다. 가정통신문을 나눠줄 때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부모를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닐지, 영영 볼 수 없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자라나는 건 아닐지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소녀 소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단단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했다.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타인의 아픔을 더욱 깊이 공감했고, 배려할 줄 알았다. 다행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건 나였다. 아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숨기지 못하는 내 마음과 애처롭게 바라보는 섣부른 눈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