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내게는 ‘되고 싶은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으냐에 따라 분류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되고 싶은 것’이 없는 중학생이라니. 그런 애를, 그러니까 분류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 중학생이 하는 모든 행동은 다 뭐가 되려고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서론을 살고 있어. 나머지는 다 여분이지. 어른이 되면 사라질 것들.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 p.36 「Chapter 1. 봄」 중에서
팬픽을 쓰면 나는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사랑에 대해 쓰면 된다. 개연성 같은 거 없이. 사회적 함의 같은 거 없이. 팬픽 속의 세계는 오직 사랑을 축으로 움직이고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 현실의 사랑은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지만, 팬픽 속의 사랑은, 적어도 내가 쓴 팬픽 속의 사랑은 오로지 사랑에 의해 무너진다. 일종의 사고실험 같은 거랄까. 진공상태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그릴 수 있다는 게 팬픽 쓰기의 가장 멋진 점이다.
--- p.53 「Chapter 1. 봄, J여신의 일기」 중에서
4편에서 이안이 ‘가장 좋은 순간에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 호수야. 너는 이런 마음을 아니. 기뻐도 슬프고 슬퍼도 기쁜 마음.’이라고 말하잖아요. 저는 사랑을 모르지만, 그 마음이 뭔지는 좀 알 것 같아요. ‘친구를 만났을 때 즐거울수록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이 울게 된다.’는 마음도 뭔지 알 것 같아요.
--- p.56 「‘Chapter 1. 봄, 방명록」 중에서
살기 위해 피아노를 치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살기 위해 뭔가를 하는 마음. 그러고 보면 J여신의 일기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었다. ‘살 이유를 찾지 못하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눈을 크게 뜨고 살아야 할 이유를 샅샅이 찾으면서 살고 있다.’
--- p.69 「Chapter 2. 여름」 중에서
제 경우엔, 이런 마음이에요.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하는 느낌. 애를 써서 올라가지 않으면 그냥 죽음으로 내려가는, 그런 에스컬레이터 위를 걷고 또 걷는 느낌. 다잉님은 다정한 분이시니까 다잉님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봐요. 등나무꽃을 보고 제 생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 있을게요.
다잉님의 친구분이 살기 위해 하시는 일이 그분께 즐거운 일이길 바랍니다. 그러면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p.110~111 「Chapter 2. 여름, 방명록 답글」 중에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향성도 없는, 그저 우연한 일련의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소설 쓰기는 그 사건들에 임의로 개연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운명을 결정해주는 존재는 없지만 저는 제가 만든 인물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죠.
--- p.209 「Chapter 5. 겨울, 방명록 답글」 중에서
그 애는 나의 ‘흑역사’였다. 이제는 십대 시절의 가짜 즐거움과 작별해야 했다. 모든 건 진짜 연애를 경험할 수 없던 사람의 미봉책일 뿐이었고, 그래야 했다. 이제 나는 본론을 살고 있었다. 더 이상 서론에 집착해서는 안 됐다.
--- p.227 「Chapter 5. 본론」 중에서
서울에서 고작 2년여를 보냈을 뿐이었지만 그때 나는 이미 바다를 보면 “와! 바다다!” 하고 외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바다가 반가우려면 먼저 바다와 멀어져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설프게나마 서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진해는 더 이상 집이 아니었고, 본가와 과거와 바다가 있는 곳일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의 세계는 변하고 있었다. 그 세계에선 바다 냄새가 나지 않았다. 호수와 이안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 나는 남자와 연애를 하다 헤어진 보통의 여자였다. 나는 우울하지도 살이 찌지도 유니버스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본론의 세계는 서론을 몰랐다.
--- p.229 「Chapter 5. 본론」 중에서
결혼이라는 게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지였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허니가 가끔 레즈비언들도 결혼을 하더라, 같은 말을 하면, 우리도 이미 결혼한 거나 다름없지 않아? 하고 넘기곤 했다. 어차피 시스템 안에 우리의 자리는 없는데. 어차피 서류상으로 우리는 남남일 뿐이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남을 텐데. 그렇게 내가 우리의 ‘없음’에 천착하는 동안 허니는 시스템 밖에서라도 우리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하고, 기념하고, 축하받고 싶었을 것이다.
--- p.251~252 「Epilogue. 다이네 허니」 중에서
팬픽 속의 인물들처럼, 나는 사랑을 찾고 싶었다. 새로운 연애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해피엔딩’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허니를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 레즈비언이 되어야 했다. 결국 사랑을 한다는 건 나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나를 선택하고 나를 갱신하는 일이었다.
--- p.252~253 「Epilogue. 다이네 허니」 중에서
나는 유니버스로부터, J여신으로부터, J로부터 왔다. 허물어진 사랑으로써 나의 유니버스는 완성되었다. 나의 상식. 세상의 규칙. 사회적 관습. 그런 게 아니라 사랑이 곧 당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다. 오직 사랑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빛나는 세계. 나는 그 안에서 살고 싶었다.
그건 진짜였다. 모든 게, 있었던 일이었다.
--- p.255 「Epilogue. 다이네 허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