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내가 한부모 가정인지 모르는 친구가 술자리에서 부모 없이 자란 애들이 권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어딘가 뒤틀려 있어서 무서운 놈들이라고, 그놈들을 괜히 ‘결손 가정’이라 부르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친구를 한참 바라만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 접니다」중에서
나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순간이 좋았다. 바람을 가르고, 바람이 내 솜털 하나까지도 스쳐 지나가는 그 감각이 좋았다. 바람은 나를 이해하는 것 같았고, 나 또한 바람을 사랑했다.
---「내 안에서 뭔가가 무너진 날」중에서
선생님이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까 나에 대해 말할 때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좋다고 했고, 그는 내게 급식비뿐만 아니라 방과 후 수업비도 원한다면 지원해주겠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나를 불행에서 꺼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열과 성을 다해 내게 어떤 혜택을 줄 수 있는지 말하는 걸 듣고 있을 때면, 숙제 끝나고 받는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내 삶에 ‘참 불행해요’ 도장이 찍힌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날 도와줄수록 내 삶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족하고 어딘가 모자란 삶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멸감에 대하여」중에서
아직 학교에서 확실히 지원을 약속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얼마나 불쌍한지 테스트하는 심사에서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지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나라에서나 학교에서 늘 무엇인가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가난에 있어서는 꽤 자신 있는 집안이자 어떤 보조금도 타 먹을 수 있는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집안이었다.
---「모멸감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우리가 정작 우리들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은 나누었지만, 기쁘고 슬픈 것은 나누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당시에 말하기보다는 다 지나고 나서 덤덤하게 말할 수 있을 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생각, 그 두려움」중에서
아씨, 갑자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 나 이거 한 번도 슬프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버지 없는 거 나한텐 너무 당연한 건데, 근데 이럴 거면 대체 왜 낳은 거야? 왜 버렸어야 했는데? 나는 왜 평생을 엄마도 아빠처럼 날 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내 곁에 아무도 안 남을까 봐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데? 아, 미안해, 이러려고 말한 건 아닌데.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청승맞았다, 그치? 그날, 감히 나에게도 묻지 못했던 의문들이 솟구쳐 오르던 날,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생각, 그 두려움」중에서
당신의 모습 대신 가끔 당신의 장례식을 상상한다. 영정사진 속 당신의 표정을 보고 싶다. 조문객은 얼마나 왔는지도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당신 삶의 의미가 얼마나 같잖은 무게를 가지는지 알고 싶다. 물론 나는 당신의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장례식에서 당신 삶의 의미가 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조용히 죽어라.
---「아버지에게 바치는 오래된 편지 2」중에서
지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장되게 말을 하거나 자극적인 단어를 택할 때가 있다. 그것이 내 마음이 아닌데도 내 마음인 것처럼 위악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로 인해 내가 특별해지고 내가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은 그것을 스스로 눈치채면 상대에게 방금 것은 과한 말이었다거나 말실수라고 급히 정정하지만, 내 안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은 참기 힘들다. 또 거짓말했네?
---「아빠 없는 게 죄인가요?」중에서
아직 우리 형제는 엄마를 바라보기엔 너무 어렸다. 엄마도 분명 당신을 바라봐줄 어떤 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이해되는 것이 있고, 치유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엄마를 떠올리면 슬퍼진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이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면 두 아이의 삶을 의연하게 바라봤던 엄마를 떠올린다. 그러면 엄마를 바라볼 수 있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오래된 편지 3」중에서
내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낙인찍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아빠를 닮으면 안 된다. 아니, 아빠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빠에게서 그 어떤 영향도 받아서는 안 된다. 눈이 아빠를 닮았다면 뽑아버려야 하고, 말투가 아빠를 닮았다면 혀를 잘라야 한다. 아빠처럼 시간을 날리는 손가락이라면 잘라버려야 하고, 아빠처럼 어떤 길도 걷지 않을 바엔 두 다리를 잘라버리는 게 낫다. 그렇게 하나둘 잘라낸 내 몸뚱어리가 기어코 아빠를 닮았다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생각, 그 두려움」중에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다른 이의 무자비한 편견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나를 표현할 수 없으니 말들의 파도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꼴이다. 나는 아빠가 아니다. 엄마도 아니고 형도 아니고 애비 없이 자란 후레자식도 아니고 편모 가정의 불우한 결과물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다. 오랫동안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생각, 그 두려움」중에서
나는 ‘후레자식’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고아롬’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릴 수 있기를 바란다. (…) 어떤 집단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삶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과 말에서 나오는 그 삶을 보길 원한다. 어떤 이론에 가려진 당신 말고, 그저 당신을 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편견 어린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길 멈추고 싶다. 사건 너머 그 사람의 삶을 생각하고, 또 상상하면서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에 그와 함께 도달하고 싶다. 그것이 그에게 아주 작은 구원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세상을 구할 거대한 구원보다는 작은 구원을 바라며 살겠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중에서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법이 없고 종이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평생 나를 괴롭힐 줄 알았던 편견 어린 시선도 이제는 담담히 받아낸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 편견이 걷힌 세상에서 우리 모두 고유하게 자유롭기를 꿈꾼다.
---「그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 살아가는 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