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장수 조신선이다.
천하에 모르는 책이 없고, 구하지 못하는 책이 없노라.”
책장수 조생, 독서 영재 추재를 만나다
조생은 한양의 책장수였습니다. 책을 팔러 다닌 지가 아주 오래되었고, 또 언제나 나는 듯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당시 한양 사람들은 누구나 바로 조생을 알아보았답니다. 하루는 조생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운종가를 쌩하고 달려갈 때였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한눈팔며 다가오는 꼬마 아이를 피하려다가 조생은 길가 풀밭에 개구리처럼 풀썩 널브러졌지요. 그러자 조생의 몸속에서 책이 튀어나와 온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조생은 다른 책장수들과 달리 책을 품속이나 소매 속에 가득 넣어서 다니곤 했지요. 그런데 어린아이가 떨어진 책의 제목을 곧바로 알아보는 게 아니겠어요? 그 아이의 이름은 추재인데, 알고 보니 예닐곱 살에 『논어』와 『맹자』를 뗀 독서 영재였습니다. 최고의 책장수 조생과 독서 영재 추재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금서를 읽고 싶어 하는 간서치 유만주
하루는 조생과 추재가 한양의 유명한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 유만주의 집에 책을 팔러 갔습니다. 간서치라는 별명답게 유만주의 서재에는 만 권이 넘는 책이 쌓여 있었습니다. 유만주는 조생에게 중국의 역사가 주린이 쓴 『명기집략』과 『강감회찬』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은 나라에서 읽지도 지니지도 말라고 엄히 금해 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판 ‘금서’였던 것이지요. 조생이 극구 말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만주는 걱정 말고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조생은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만 하고 나왔지요.
『주자대전』을 구해 오라 : 조선 시대의 서점, 출판사, 종이 공장을 찾아서
한편 조생은 숭례문 근처에 사는 어느 부유한 양반에게서 100여 책으로 된 『주자대전』 한 질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천하에 구하지 못하는 책이 없는 조생이지만, 『주자대전』은 찍은 지 하도 오래되어서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답니다. 현대의 광화문 교보문고와 같이 규모가 크고 책이 빠짐없이 잘 갖추어진 서점인 광통교의 ‘박도량 서사’에 일단 가 보았지만 책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립 출판사 격인 ‘교서관’으로 가 보았습니다. 교서관에는 틀린 글자 하나당 볼기를 30대씩이나 맞아야 하는 관리들이 열심히 교정을 보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그들에게 『주자대전』이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지금은 재고가 없고, 일단 주문장을 쓰고 종이를 구해 오면 목판으로라도 찍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생과 추재는 세검정에 있는 종이 공장인 ‘조지서’를 찾아가서 종이를 샀습니다.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과 교서관은 물론이고 종이 공장까지 누비고 다니는 조생의 집념에 추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조선 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조선 시대 베스트셀러에는 어떤 책들이 있었을까요?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한글 소설이었습니다. 한글 소설은 특히 부녀자들에게 단연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집 안에 꼭꼭 갇혀 살면서 별다른 유흥거리가 없던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한글 소설은 요즘의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최고의 즐거움이었지요. 하지만 양반 남성들은 여성들의 한글 소설 읽기 열풍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책을 구하느라 재산을 낭비하고, 소설의 내용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생은 삼청동 윤 판서댁 마님에게서 180책으로 된 『완월회맹연』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무척 난감했습니다. 윤 판서댁 마님이 그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큰 사단이 나거니와 그렇게 분량이 많은 책을 어떻게 완질본으로 구할 수 있을지 막막했기 때문이지요.
도서 대여점, 세책가
고민하던 조생은 ‘세책가’에 가 보았습니다. 세책가는 반지나 팔찌 같은 물건을 저당 잡히거나 돈을 내면 책을 빌려 주는 도서 대여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책가에서도 『완월회맹연』 전질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책가 주인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세책가에서 소설 필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궁녀에게 부탁해 궁궐에서 『완월회맹연』을 빌려 오게 한 후 그 책을 필사해서 완질본을 만들자는 거였습니다. 조생은 드디어 책을 구할 수 있게 됐다는 기쁨에 어깨춤을 추며 곧장 윤 판서댁 마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신선 같은 책장수, 조신선
이렇듯 조생은 모르는 책이 없고, 구하지 못하는 책이 없는 최고의 책장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신기한 면이 많았습니다. 조생은 스스로 말하기를 더러운 것을 손에 대기 싫어 밥을 일절 먹지 않고 술만 마신다고 했습니다. 나이는 몇이고 가족은 있느냐고 물으면, 조생은 나이는 세어 보지 않아 모르고 가족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조생은 이렇듯 기이한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점은 세월이 지나도 그의 얼굴이 하나도 늙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생을 알고 지낸 사람이 수십 년이 지나 그를 다시 보아도 늘 30대 청춘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생을 일컬어 늙어 죽지 않는 신선과 같다 하여 ‘조신선’이라고 불렀답니다.
금서를 파는 책장수 배경도
조생과 같이 활동하던 책장수로 배경도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배경도는 나라에서 금서로 정한 『명기집략』을 종종 팔곤 했습니다. 조생은 배경도에게 그러다가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그런 책은 절대 팔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배경도는 “다른 책장수도 모두 팔고 다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가.”라고 쏘아붙이고는 돌아서 가 버렸습니다. 조생은 위험한 욕심을 부리는 배경도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장수를 모조리 잡아들여라!
어느 날 밤, 조생은 자신에게 『명기집략』을 부탁했던 간서치 유만주의 집을 급히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유만주는 아직 『명기집략』을 구해서 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명기집략』은 주린이라는 한 중국인의 개인 역사서이지만, 조선 왕실의 계보를 왜곡해 놓은 아주 고약한 책이었습니다. 왕조 시대에 왕실의 계보를 왜곡하는 일은 참을 수 없이 큰 모욕이었지요. 게다가 그 책은 영조의 탕평책을 비판하는 세력들이 임금을 비난하려는 마음에서 즐겨 찾고 있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명기집략』을 문제 삼는 상소가 올라오자 영조는 『명기집략』을 읽은 사람은 물론이고 지니고 있거나 팔던 자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당장 이희천을 비롯한 양반들과 『명기집략』을 취급했던 책장수들이 몽땅 잡혀 들어가지요. 그중에는 조생의 충고를 무시했던 배경도도 있었습니다. 임금은 죄의 경중을 가려 참형에 처하거나 흑산도로 유배를 보내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명기집략』이라는 책 한 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형벌을 받은 것이지요.
나는 지상에 사는 신선이로다
『명기집략』 사건은 영조 47년(1771년)에 실제로 일어난 일로서 요즘으로 치면 대형 공안 사건이었습니다. 한양의 책장수들이 모조리 잡혀 들어간 마당에 우리의 조생은 어찌 되었을까요? 간서치 유만주를 급히 찾아간 날 밤, 조생은 그 길로 남쪽으로 내달려 한양을 빠져 나왔습니다. 조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사람들은 그가 어명을 받들어 『명기집략』을 거두어 없애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한양의 책장수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책장수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때는 추재도 어느덧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추재는 그날도 광통교를 지나며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리의 맹인 가수 손 봉사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리에 조생이 떡하니 나타난 게 아니겠습니까! 수십 년 만에 조생을 다시 만난 추재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습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조생을 위해 써 두었던 시 한 수를 꺼내 주었지요. 시를 읽은 조생은 매우 흡족해하며 말했습니다. “나보고 전우치와 장생이라! 아무렴, 그렇지, 나야말로 지상에 사는 신선이지. 하하하!” 그러고는 책을 팔러 가야 한다면서 또 쌩하니 달려가 사라졌답니다.